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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돋움 Nov 23. 2023

토끼 가습기

회사 책상 뒤 붙박이장 맨 아랫칸 잡동사니 바구니를 쪼그려 앉아 한참을 뒤적였다. 분명히 작년 이맘때즈음 가습기를 말리고 필터와 분리해서 봉지에 넣어 정리해 둔 기억이 나는데... 노란색 시장바구니를 10여분 뒤적이며 바닥을 훑어도 가습기 비슷한 녀석 뒤통수하나 보이지 않는다.

뒤적이던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발도 가지런히 모아 앉아 턱을 깍지 낀 손에 괴고 무릎 위에서 안착시킨다. 어디 있지... 어디 있지.... 올봄 가습기 행적을 따라 기억을 거슬러 되감기 버튼이 망가질 때까지 눌러대도 결론은 매한가지다. 이바구니 말고는 둘 곳이 없다.


오늘부터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지는 바람에 얼마 전까지 시크하게 냉기를 뿜어 대던 냉온풍기는 오늘부터 화끈하게 온풍으로 갈아탔다. 온풍을 틀고 2~3시간이 지났을까 바로 몸에 건조주의보가 발효됐다. 눈알이 뻑뻑하고 목이며 콧구멍 속에서도 쩍쩍 가뭄에 논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냉큼 일어나 물 한 컵을 원샷하고 붙박이장을 열어젖혀 가습기를 찾아 나섰다. 골몰하느라 쪼그려 앉은 다리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바구니에서 꺼내 놓은 잡동사니 사이에 나는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쓰지도 않는 물건이 뭐 이리 많은지.

주말에 김창옥 쇼를 보면서 들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옛날엔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샀는데, 요즘은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이상으로 산다고.

내가 딱 그렇다. 그놈에 배송비가 뭔지. 배송비 아끼겠다고 필요할 것 같은걸 장바구니에 막 담았다. 쌓인 잡동사니가 그 장바구니에 있었던 녀석들이겠지. 한심하다.


없으면 물수건을 널어야 하나, 새 녀석을 사야 하나~

주저앉아 잡동사니를 주섬주섬 바구니에 넣는데 붙박이장 구석 모퉁이에서 연 핑크 색 비닐봉지가 언뜻 보였다. 옳거니~ 바구니에서 떨어졌었구먼. 냉큼 기어들어가 봉지를 집어든다. 토끼 모양 귀가 달리고, 나름 분위기도 업시킬 무드등도 탑재된 이 녀석이 올해도 나를 히터로부터 구해낼 히어로가 되어줄지. 기대하며 받아놓은 물을 쪼르륵 따르고, 커넥터를 연결하고 전원 버튼을 켠다.  


크기는 작아도 할 일은 똑 부러지게 잘 해내는 녀석이다. 증기가 퐁퐁 잘도 나온다.

요 녀석이 건조한 내 마음까지 촉촉하게 해줄 수 있음 좋겠다는 실없는 희망이 힘찬 증기 사이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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