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사는 민이가 진단받은 지 7년, 태어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그 아이의 마음을 단 한 번만이라도 느껴보고 싶었다. 민이의 저 조그마한 세상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까? 그 속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저 아이는 비좁고 답답한 그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무서울까? 고립된 아이를 꺼내 박형사는 한없이 안아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며 다독이고만 싶다. 10년 전부터 사건 피해자들의 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 혹시 민이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올수도 있을 그 날을 위해 박형사는 모든 사건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소홀 할 수가 없다.
피해자들의 마음이 읽히기 전. 박형사에게 선행되었던 것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지독히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악몽과 함께 김교수에게서 전해진 포스트잇이었다. 처음 부검서에 붙여진 그것을 발견했을때 박형사는 김교수의 개인자료에서 묻어온 것이라 생각했다. 개인자료 중에서도 전화번호나 주소 같은 숫자가 조합된 명확한 자료였다면 바쁜 와중에도 아마 전화를 걸어 포스트잇의 자료를 전달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고 단조로운 세개의 단어들. 뭔가가 생각나 끄적인 듯한 그 종이조각을 박형사는 바로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까 잠시 망설이다 마음을 바꿔 다음 부검서를 받아올 때 전해 줄 심산으로 책상 파티션에 무심히 붙여 두었었다. 사건의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명확히 피살된 피해자의 부검을 실시하고도 현장에선 가해자의 지문이나, 족적, 피해자 이외 발견된 DNA가 전무했다. 박형사는 몇 일째 퇴근도 없이 책상에 붙박여 사건 주변 CCTV를 뒤지고 있었다. 그사이 책상위로 다 먹은 컵라면과 종이컵이 쌓이고, 갈아 입지 못해 쉰내가 풀풀나는 흰색 티셔츠는 누렇게 물들어갔다.
[박형사님 오늘은 집에 좀 들어가시죠.]
[어어. 어서 들어가 나는 신경쓰지말고 푹 자고 와]
피로에 찌들어 눈이 반쯤 감긴 후배 김형사가 외투 걸칠 힘도 없는지 오른손에 점퍼를 움켜쥐고 박형사만 두고 퇴근하기 자못 마음에 걸렸던지 출입구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박형사는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본인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퇴근하는 후배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볍도록 애써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어 퇴근을 재촉했다.
양쪽 어깨에 킹콩이 매달린 듯 욱신거리고, 눈알이 빠질듯 아렸다. 마침내 눈꺼풀안에서 눈알이 제대로 돌지 못하고 턱턱 걸리며 시야가 흐려지자 박형사는 화면속 영상의 정지버튼을 클릭하고 눈을 감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건 현장은 서울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판자촌이었다. 얇은 슬레이트와 푸른색가빠로 너절하게 덮어씌운 지붕을 금가고 이끼낀 시멘트 벽돌로 간신히 버텨 만든 열악한 삶의 터전. 그 속에서 피해자는 사망한지 일주일 정도 지나 발견되었다. 가난은 원치 않는 것을 서로 나눠가져야 한다. 소리, 햇빛, 추위, 더위, 냄새까지. 담장을 가뿐이 타고 넘는 시체의 부패 악취로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주변에 알릴 수 있었다. 그러한 곳에 CCTV가 있을리 만무했다. 대부분 마을 주변을 둘러싼 경계의 상가와 큰도로의 방범용이라 녹화파일의 양이 실로 방대했다. 삐걱거리는 허리를 비틀며 박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컴컴하고 텅빈 사무실을 박형사 책상의 스텐드 불빛만이 고요히 밝히고 있었다. 가난에 몸부리 치며 외롭게 살아왔을 피해자를 허망한 죽음으로 내몬 그 놈을 박형사는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실마리의 터럭이라도 오늘저녁엔 꼭 잡아낸다!]
박형사는 밤새며 온몸에 더덕더덕 들러 붙은 피로를 몰아내기위해 팔다리 이곳저곳에 골고루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학창시절 운동장을 축구로 누비고 다닌 기초 체력이 아직 박형사에게 남아 있어 나이들며 살이 좀 붙긴 했지만 아직도 현장에서 체포작전을 펼칠때 후배들에게 크게 뒤쳐지지는 않았다. 널직하게 벌린 다리의 무릎을 굽히고 그 위에 손을 올리며 왼쪽 오른쪽 어깨를 돌아가며 눌러주고, 두손을 모아 앞으로 쭉 뻗고 양팔을 벌려 돌렸다. 마지막으로 팔을 벌려 허리를 왼쪽 오른쪽으로 확 비트는 동작을 할때였다. 과하게 돌아간 왼손 끝이 그만 책상 서류 캐비닛 위에 올려두었던 커피잔을 손으로 쳐 버렸다. 커피가 남아있는 종이컵은 책상위 사건기록지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고 박형사는 서류에 커피가 묻을세라 얼른 기록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파일 사이에 끼워두어던 사건관련 사진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쏟아져 내린 사진들 중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시체 사진이 쏟아진 사진더미 위로 하늘하늘 작은 포물선을 좌우로 그리며 천천히 떨어졌다.
[어휴 이런]
박형사가 허리를 굽혀 사진을 주우려던 순간 모니터와 책상 사이 김교수에게 전해주려 했던 파티션에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꽃무늬 벽지, 절름발이, 체크무늬 셔츠 ]
박형사는 뭔가에 이끌리듯 바닥에 떨어진 피해자사진을 들어올려 스탠드 불빛으로 가져왔다. 심하게 훼손된 후 부패가 시작된 시체 너머 여기저기 비산혈흔이 흩뿌려진 푸른색 바탕에 핑크색 꽃무늬를 올린 빛바랜 벽지가 그곳에 있었다.
[빛바랜... 꽃무늬 벽지.]
어안이 벙벙한 박형사가 의자에 털썩주저 앉아 뒷머리를 긁었다.
[우연이겠지? 우연이지 그럼.]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 앞으로 다가선 박형사는 정지중이던 CCTV녹화 화면 속 가로등 밑을 지나는 체크무늬 셔츠차림의 남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빛바랜 꽃무늬 벽지, 체크무늬 셔츠!]
우연이 아니다! 박형사는 형사들만의 촉이 뻗치며 찾아다니던 그놈을 발견했을때의 전율이 온몸에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믿을 수 없는 잇다른 포스트잇의 예언적 적중에 쐬기를 박을 마지막 단서를 확인하기 위해 박형사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플레이를 클릭했다. 그러자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건장한 남자는 왼쪽 다리가 짧은지 심하지 뒤뚱거리며 가로등 밑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순간부터였다. 박형사의 가슴에 울분과 설움, 고통과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한 시점이. 심장을 짖누르는 번뇌가 박형사를 집어 삼킬 듯 잠식해와 박형사는 비틀거리다 그만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감정은 형사가 가해자를 향해 느낄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었다. 살인자에 대한 분노, 그 놈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억울함. 이것은 분명 살인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려줄 수도 없는 살인피해자들의 마음. 그때부터 박형사는 피해를 입은 그들의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으로 인해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박형사에게 배당된 강력 사건 중 사망사건은 모두 3일 이내에 가해자에게 수갑을 채울 수 있었다. 박형사에게 죽은 피해자가 보이고, 그 피해자가 가해자를 지목한다는 둥. 승진 가능한 사건만 콕 집어 매달려 해결한다는 둥. 사건이 일어날 때 그 현장을 미리 가볼 수 있는 능력이 박형사에게 있다는 둥. 박형사에 관한 미스터리 한 소문이 파다 했지만 모두 추측성인 데다, 평소 법없이도 살법한 곧고, 온화한 인품의 박형사였으므로 누구 하나 대놓고 박형사를 시기하거나 그의 실적에 대해 이죽대진 못했다. 무튼 그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 후 경찰 시험을 5년 만에 합격해 고만고만한 사건들을 그럭저럭 해결했던 박형사는 갑작스럽게 비범한 수사 능력이 발휘되며 특진의 특진을 거듭했고 지금의 강력 1팀 팀장이 되었다. 처음엔 겁이 나고 두렵기도 했다. 김교수가 적어둔 포스트잇의 단어는 사건해결의 명확한 단서였음에도 김교수는 단 한 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심지어 포스트잇에 대해 언급한 적도 없었다. 그런 김교수에게 박형사도 포스트잇에 대해 감히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교수에게는 대체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대가없이 계속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일까? 박형사는 사건이 시작되었을땐 해결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다가도 범죄자가 잡히고 사건이 마무리되고 나면 늘 진한 궁금증이 밀려오곤 했다. 박형사는 모든것이 미스터리 하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고 느꼈다. 김교수도 사망사건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것. 그 어떤 의미에서도 박형사는 언젠가는 김교수를 직접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