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망자의 목소리를 들렸을 때 김교수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저는 왜 이곳에 누워 있는 거죠? 무서워요.]
부검을 위해 메스를 들어 올린 김교수는 가슴으로 스며들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만 메스를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어시스트를 위해 준비 중이었던 레지던트가 놀란 눈으로 마스크를 착용한 김교수의 얼굴을 살폈다. 여리고 가느다란 소녀의 목소리. 차가운 부검 테이블에 누운 소녀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듯 생생하게 울리는 그 소리에 김교수는 행동뿐만 아니라 사고가 정지되는 듯했다. 언젠가 느껴 본 듯한 이 느낌이 묻어나는 소리.
'언제였더라...? 아니... 나는 아내와 아이를 잃었지. 가족을 잃은 자의 머릿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환청이야 이건.'
김교수는 머리를 털어내고 정신을 부여잡으며 레지던트에게 새 메스를 건네받았다.
[혹시 선생님. 선생님은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들리시는 거... 맞죠?]
복부를 긋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을 꺾어 메스 끝을 기울이려던 그 순간 다시 한번 망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김교수는 메스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하고, 등뒤로 몰아치는 서늘한 한기에 근육이 오그라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다. 목소리가 망자의 몸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고 있다. 확인이 필요했다. 부검시작부터 레지던트의 사물함에서 전화벨이 연달아 울려 댔다. 부검실에 급하게 도착해 보호복을 갈아입느라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전환하지 않고 부검을 시작한 레지던트는 신경질적으로 연달아 울려대는 벨소리에 김교수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어서 가서 전화받고 오게 계속 울리는 것 보니 급한 것 같은데. ]
[아닙니다. 교수님. 혼자 힘드시게 어떻게.]
[아니야 정말 괜찮네. 가서 편하게 전화받고. 간 김에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둔 올해 부검 통계자료 정리 좀 부탁하네]
[아. 네 그럼 죄송합니다.]
레지던트가 부리나케 보호복을 벗고 부검실 문을 나서자 김교수는 메스를 내려놓고 망자 옆에서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심호흡 후 허리를 곧게 펴고 섰다.
[당신은 지금 누워 있는 이 시신의 망자입니까?]
[네. 맞아요. 선생님. 제 목소리가 들리시는 게 맞죠? 하... 정말 너무 답답했어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김교수는 핑 머리 위로 현기증이 잃었다.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고 스테인리스 부검 테이블을 재빨리 부여잡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며 김교수는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저도 망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당신이 처음이라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
[하... 그러시군요... 놀라셨겠지만. 저는 선생님 이외 지금 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저는 너무 억울해요.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저를 이렇게 만든 그놈을.... 꼭 벌 하고 싶어요. ]
망자의 목소리가 천천히 김교수에게로 전해지자 김교수는 집사람과 지민이가 떠올랐다. 여리디 여린 집사람, 아직 중학생이라 아무것도 모르는 지민이. 갑자기 망자가 된 이후 두 사람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망자의 목소리가 떨려오자 김교수는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떨리는 손으로 부검의뢰서를 훑어본 김교수는 결심한 듯 망자에게 말을 건넸다.
[하... 저도 집사람을 먼저 보내고, 얼마 전 사고로 딸아이도 잃었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당신이 얼마나 힘이 드실지 이해가 됩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당신을 그렇게 만든 그놈을 잡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혹시 사고당시 무언가가 보이거나 생각나는 게 있으신가요?]
[음.. 제 방안이요.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방인데.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줄곳 저 혼자 그곳에서 지냈어요. 할머니는 꽃무늬를 아주 좋아하셨죠. 그래서 꽃무늬가 들어간 벽지로 도배를 했었어요.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 빛이 바래긴 했지만.]
[빛바랜 꽃무늬 벽지. 그놈에 대해선 뭔가 생각나는 게 없나요?]
[제 방에 몰래 들어와 자고 있던 저의 입을 막고 제 옷을 거칠게 벗겼어요. 그때 밖이 보름이라 달빛이 들창으로 드리워졌었는데... 얼굴은 복면을 쓰고 있어 보지 못했지만, 그놈의 카라깃이 보였어요. 체크. 체크무늬가 있었어요. ]
[체크무늬 셔츠. 또 다른 것은요?]
[제가 거칠게 반항하자 제 입을 테이프로 막고, 싱크대로 걸어갔어요 그때 걸음걸이가. ]
[걸음걸이가 어땠나요? 특이했나요?]
[네 절룩거렸어요. 왼쪽으로 기우뚱하면서 걸었던 것 같아요. 그 후 제가 기억하는 건 부엌을 뒤져 가져온 과도 끝 칼날이 방으로 들이친 달빛에 번쩍하며 내 머리 위에서 빛났다는 것. 거기까지가 제 기억이에요.]
[좋아요. 제가 이 세 가지 단서를 경찰에게 잘 전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저는 오늘 당신의 몸을 칼로 가르고 장기를 꺼내 많은 검사를 할 거예요. 힘드시겠지만. 이것 또한 사건해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감사합니다. 지금은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짓눌려 제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저 빛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놈이 잡히고 나면... 저도 저 따뜻한 빛 속에서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
[저도 처음이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을까요?]
부검을 마치고 결과서 작성을 완료한 김교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망자에게서 알게 된 정보를 어떻게 경찰에게 전달해야 할까. 사실대로 전하면 김교수는 정신적 문제로 이후의 부검은 물론, 교수 자리까지 박탈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살인사건 조사에 관련된 사항들을 망자가 전한 요소로 더 조사해 보시는 게 어떻냐고 조언하는 것도 경찰입장에선 월권이다. 부검 결과서를 들고 고민하던 김교수는 책상 위에 놓인 노란색 포스트잇이 눈에 뜨였다.
'노란색은 눈에 잘 뜨이지. 보고서에 이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다면. 경찰은 이 내용을 읽어 볼 수밖에 없을 거야.'
망자가 보낸 단서가 적힌 이 포스트잇은 그 이후로도 계속 이렇게 박형사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