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혁 2

by 발돋움

[학생 어머니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월세가 한두 달 밀렸어야 말이지. 보증금도 벌써 다 까먹고 없어. 이번 주 안으로 돈을 해결하던가 이사를 가던가 아무튼 결단을 내줘.]


진혁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대문소리에 부리나케 달려 나온 주인집 여자는 진혁을 위아래로 훑어가며 쏘아붙이고는 퉁실한 몸에 꽉 끼인 감색 카디건을 싸잡아 여며 가며 휑하니 뒤돌아 갔다.

항상 오물을 토해낸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었던 그것을 인정하기는커녕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며 도망가기 바쁘다.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은 오물 같은 존재인 진혁을 반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주제도 모르고 세상 속에 어떻게든 뿌리내리려 발버둥 친 진혁에게 잘못이 있는 걸까? 자신이 혐오스러워했던 이 동네에서 조차 소속을 거부당한 진혁은 전의를 잃고 무력해졌다.

[저년도 벌 받지.]

이진혁의 집 골목 맞은편에 살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할머니는 진혁이 올 때까지 기다린 듯 초록색 우유 상자를 뒤집어 만든 전용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가 오거나 추운 겨울이 아닌 이상 나무 지팡이 머리에 두 손을 포개어 모으고 앞으로 살짝 기댄 채 정물같이 늘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 그곳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지그시 지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때로는 시선 넘어 다른 무언가를 더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초점 없이 앞을 주시하곤 하는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파. 성성한 백발을 귀밑까지 바짝 자른 짧은 단발머리, 주름이 깊이 파이고 검버섯이 뒤덮은 갸름한 얼굴 속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모호한 표정. 삶의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듯한 노파가 입고 있는 옷가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핑크색 도톰한 카디건, 혹은 아기자기한 잔 꽃무늬가 새겨진 점퍼 등이라 마치 매일 할머니 인생에서 바뀐 옷들만 재생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정물 같은 노파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진혁의 고등학교 입학식날이었다. 첫 교복을 입고 찌그덕 거리는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서며 할머니의 앞을 지나치자 이제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을 만큼 작은 그 목소리는 골목의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의 싸움소리, 세숫대야에서 무심히 쏟아부어지는 세숫물 소리 등 잡다한 소리에 파묻히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진혁이 등교할 때마다 들려오던 어느 날 진혁은 마침내 할머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를 뒤돌아 보았다.

[선택이 중요하지. 뭘 선택할지는 본인에게 달렸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좁다란 골목 맞은편 쪼개진 담벼락을 비집고 쭈뼛 자란 이름 모를 잡풀을 지그시 응시하며 할머니는 독립영화의 잔잔한 내레이션처럼 혼잣말을 했다. 할머니의 그 혼잣말은 이상하게도 진혁의 가슴속에 깊숙이 아로새겨졌다. 그 이후로 오늘 진혁은 할머니의 목소리를 두 번째로 듣게 되었다. 여전히 진혁을 불러 세우지도 않고 혼자 하는 넋두리처럼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특유의 느긋하고 낮은 음성으로 죽 읊고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단호한 생각을 덧붙였다. 이진혁이 학교로 등교한 이후 119가 도착했고, 도착한 이후 어머니가 들것에 실려 나가고 엠뷸런스 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인집 여자가 해댄 모진 말들을 녹음해서 재생이라도 하듯 하나하나. 할 말을 마친 할머니는 끙 힘을 주어 지팡이로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뒤돌아 자신의 집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삶과 똑 닮은 동네. 지독히도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 녹아 있는 이 방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이진혁에겐 굴뚝같지만 당장은 버텨야 했다. 거기다 대학 입학 때 필요한 대학 등록금도 마련해야만 한다. 이진혁은 결심한 듯 집안을 뒤집기 시작했다. 서랍장, 장롱, 싱크대, 장판 밑까지 모두 탈탈 털었지만 현금은 물론 통장, 보험증서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망연자실한 이진혁은 벽에 기대어 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쓰러졌다. 어디를 가든 이진혁은 잘 버틸 수 있고 무엇을 하든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진혁에겐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돈도, 등을 붙이고 살아갈 방한칸도, 증오하던 어머니마저도. 태어나 처음으로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사람조차 이진혁에겐 없었다. 헉헉.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가슴에서 올라온 울분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널브러진 세간들 사이에서 몸을 비틀며 울고 몸부림치던 이진혁이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을 닦기 위해 휴지를 찾아 더듬거리던 손에 바스락 거리는 무언가가 잡혔다.

[모르핀, 펜타닐 패치, 옥시코돈, 메타돈.]

진통제로 버티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약들은 대부분 마약성 진통제였다. 이진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물이 한 번에 가시며 시야가 밝아졌다. 그리고는 이내 눈빛이 번뜩였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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