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만의 테이블 용도는 책 읽기다.
'좀머 씨 이야기'를 읽고 싶어 도서관에 대여하러 가기 위해 바깥 날씨를 살피지만, 오늘 날씨는 나가기가 영 낵히지 않는 날씨다. 태풍 소식에 비도 오고, 구름도 잔뜩 지뿌둥한 날씨...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집에 있는 책장을 기웃거려 본다.
테스... 수레바퀴 밑에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인쇄일이 1996년이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의 책.
책 사이에는 수능용 학습지 이름이 적혀있는 종이 책갈피가 꽂혀 있다. 아마도 내가 표시된 부분까지 읽고 그다음은 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책갈피에 지금은 없는 서점 이름과 예전 지역번호가 적혀 있는 모습이 생소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책갈피를 덮기 전 그 어느 시점의 나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다.
나는 그때의 나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지만, 책의 내용이 주는 울림은 하나도 녹슬지 않았다.
그중 '우린 저능아라고요'라는 내용은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로 학교에서도 문제아로 낙인찍혀 삶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사는 아이들을 잘 가르쳐 모두 졸업시키고 성공한 학생들의 자녀를 다시 가르치며 보람을 가지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 인생도 잘 살아내기 너무 버거운데.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바꿔줄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일까?
나는, 나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줄 알았었다.
성장과정이 불우했고, 성폭행을 2번이나 당하고, 의처증이 있는 배우자와 살며 괴로웠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을. 나는 내 힘으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잘 이겨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나의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그 사람은 근무시간에도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전화를 해댔고, 주말에도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요구하며, 내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인해 나는 너무 괴로워졌다. 마치 내가 그 삶의 과정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듯한 고통스러움에.
나는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너무 힘들고, 지쳤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챈 최수연이 이준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고래 얘기 평생 들어줄 것처럼 굴다가 일 년도 못 참고 닥치라고 그렇게 영우에게 상처나 줄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요. 준호 씨도 그래요. 얼마 못 갈 마음이면 잘해주지 말라고요."
나는 그때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었다.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었는지...
나는 간호사니까.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었었다. 오히려 나의 어쭙잖은 행동이 상대방에겐 커다라 상처로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 자신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찬 내가 누군가를 담아내려는 시도를 한 것조차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을 수도.
지금도 한 번씩 생각이 난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아직도 미안하다. 언젠가는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