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수명

어머니의지혜

by 발돋움

결혼하고 5년 정도 되었을까.

어머니의 생신이 되었다. 평소 아이도 돌봐주시고, 반찬도 챙겨주시고...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아 이번엔 내가 직접 어머니 생신상을 차려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 휴가를 내고, 미역국, 잡채 거리, 생선을 사들고 시댁으로 향했다.

"뭘 음식을 한다고 그러냐. 고만 대충 먹고 말지"

"아니에요. 어머니 저 잘할 수 있어요. 어머니는 거실에 가만~히 계세요. 제가 다~ 할게요"

미덥지 않아 못내 발걸음 떼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거실로 보내드리고 음식을 시작했다. 결혼 전엔 병원 교대근무를 하느라 음식 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직장을 회사로 옮기고 출퇴근 시간이 명확해지면서 식사는 제법 많이 준비해 본터라 미역국, 잡채 정도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미역국에 넣을 소고기를 가볍게 씻어 내려고 팩을 뜯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팩이 어찌나 짱짱하게 붙여져 있었던지, 잘 뜯기지가 않았다. 그럼 가위로 잘라내면 될 것을 무슨 오기로 그걸 손을 뜯어보겠다 용을 썼는지 팩을 쥐어뜯다 뜯어짐과 동시에 작게 썰린 소고기는 주방 허공을 잠시 배회하다 바닥의 여러 곳에 안착됐다.

'헉!'

팩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나의 놀란 탄식이 새어 나오자 거실의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냐?'며 주방으로 들어오시려고 하시는걸. '아니에요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며 얼른 주워 담았다.

그때부터 나의 음식 준비는 꼬이기 시작했다.

볼에 담긴 미역을 불리기 위해 싱크대 수전의 물을 틀었는데 어쩐지 물줄기가 시원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원치 않은 물줄기의 나머지는 수전이 박혀있는 벽면과 수전 사이 볼트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 이거 왜 이러지?"

거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셨을 어머니가 이제는 더 이상 못 참으시겠는지 당황한 내 목소리가 들리자 마자 주방으로 뛰어 들어오셨다.

주방 수전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확인하시고는 전화를 걸어 밖에서 일을 보고 계시던 아버님이 소환되셨다. 아버님은 상태를 확인하시고 철물점으로 달려가 수전을 바로 사들고 오셔서, 싱크대 수전을 교체하셨다. 그러는 사이 내 표정은 점점 썩어갔다.

'나는 잘하고 싶었는데... 왜 이래 오늘...'

수전이 교체되고 나서 어머니는 팔을 걷어붙이셨다.

저녁 식탁에 오른 잡채와 미역국은 'made in 며느리'가 아니라 'made in 어머니'로 차려졌다.

영문을 모르는 아버님은 '우리 며느리가 끓여서 그런가 맛있네~'하시고, 저녁에 퇴근 후 합류한 신랑도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머니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랐던 나는 한숨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주방에 들어섰다. 그래도 설거지는 완벽하게 하고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주방세제를 묻힌 아버님 그릇은 나의 손을 거칠게 벗어나자마자 설거지통에 들어있던 접시와 부딪혀 반토막이 나버렸다.

나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아침까지만해도 완벽하고 보람찬 하루를 보낼꺼라 예상했지만, 오늘 하루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설거지를 하다 설거지 통 앞에서 울고 서있는 나를 보고 신랑도 놀라서 달려왔다.

"왜 그래? 왜 울어?"

나는 대답도 못하고 세제 묻은 손으로 눈물도 훔치지 못하고 서 있는데 어머니가 다가오셨다.

설거지 통 안에 깨진 그릇을 보며

"손 안 다쳤냐? 괜찮다. 네가 잘못해서 그거 깨진 거 아니다."

라고 하신다. 눈물을 흘리다 말고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니 어머니가 깨진 그릇을 치우며 말씀하셨다.


"그릇도 다~ 수명이 있데이, 지가 살만큼 살고, 갈 때가 되니까 니손에서 깨진기다. 네가 잘못해서 깨진 게 아니다. 오늘 음식한다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설거지는 내가 마무리할 낀 게 피곤한데 얼른 애 데리고 가서 쉬라~"


상대방의 실수를 좋은 경험으로, 기분 좋은 다독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은 연륜에서 나오는 건지, 인품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그때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한 가지는 '나도 어머니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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