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와 40대가 다른 점은
보필해야 할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
30대는 오는 잠을 뿌리쳐가며 밤에도 우유를 먹이고,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해 한 생명을 인간으로 키워내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40대가 되어 그런 아이들이 기본적인 케어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되면, 이제는 부모가 급속도로 노쇄해진다. 주름의 깊이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팔다리가 가늘어지며, 가슴이 배에 닿을 듯 허리가 휜다.
"고구마 캤다. 고구마 가지러 와라"
퇴근길에 들른 친정집 앞마당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땅을 파고, 손으로 헤집어 얻어냈을 결과물들이 사과 상자 안에 고이 담겨 있었다.
"어, 왔나~"
푸른색 붉은색 꽃무늬가 섞여 목 뒤까지 천이 드리워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엄마가 마당으로 걸어 나온다. 평생 입어도 질리지 않는지 펑퍼짐하고 발목은 고무줄로 적당히 조인 몸빼바지를 오늘도 입은 채로.
어렸을 때,
국민학교 2학년(그때는 국민학교였다) 때 일이다.
그때는 받아쓰기를 해서 점수가 낮으면 나머지 공부를 시켰었다. 집에서 따로 한글 공부를 받아본 적 없는 나는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하기 일쑤였다. 그때 당시 내가 받은 받아쓰기 점수는 20점.
10개 문제 중 8개를 틀렸으니 그 틀린 문제를 10번씩 쓰고,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쓰기 숙제가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 교실로 엄마가 찾아왔다.
농사일이 바쁜 엄마는 나를 학교에 보낸 후 한 번도 학교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가 교실에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논에서 일을 하다 왔는지 긴 장화에 흙이 여기저기 튄 몸빼를 그대로 입은 채로...
받아쓰기 20점을 받았음에도, 그런 엄마를 보고 너무 부끄러워 되레 화가 치밀었다.
엄마를 보고도 못 본 척 숙제를 선생님께 보이고는 그대로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밖에는 아침엔 오지 않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 엄마는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내가 걱정이 되어 우산을 주기 위해 일을 하다 말고 학교까지 왔던 모양이었다. 나는 오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를 맞아가며 잰걸음으로 엄마를 앞서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런 딸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정성스럽게 이쁨놈으로만 담은 고구마를 박스에 담아 주고 싶었는지...
두 상자 중 한 상자를 트렁크에 옮기고 돌아보니, 굽은 허리로 나머지 상자 하나를 끌어안고 나서는 엄마에게 나는 고구마 박스를 얼른 받아 들며 어릴 쩍 철없던 나처럼 또 소리를 질러댔다.
"허리 아픈데 그걸 왜 들어! 내가 든다니까! 허리 안 아파? 병원에 좀 가고 그래. 일 좀 그만하고!"
"아유. 이제 허리가 안 펴진다."
고단했던 그녀의 삶이 온몸 구석구석 녹아있는 엄마에게... 나는 또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눈물이 나오기 전 코 뒤쪽 어딘가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저려댔다.
몇 개월 전 엄마와의 언쟁 이후, 나는 엄마에게 세상 불편한 딸이 되었다.
즐겨먹던 사탕을 인터넷으로 사달라는 말도, 한꺼번에 받은 약을 증상이 좋아졌을 때 어떤 걸 빼고 어떤 걸 남길지 묻는 대화조차도 엄마는 나와하지 않았다.
사람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다.
엄마처럼 몸이 아픈 체, 나이가 들어가면.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자식에게 보험을 들 듯, 모든 것을 주며 매진하게 되는 게 당연할 것이고, 그것이 나에겐 동생에게 만 주어지는 편엽적인 사랑으로 비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헛헛한 마음에 '엄마 뭐해?' 하는 시답잖은 안부전화에 엄마는 또 사과밭에서 일을 하고 있단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면서, 일을 왜 저리도 놓지 못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에 목이 멘다.
이제 머리가 이해했으니, 가슴이 이해할 차례다.
언제나 가슴의 이해가 더딘 나이기에, 빨리 마음으로 엄마를 받아들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