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남희 Nov 02. 2023

회복

이사를 가게 됐다. 알아본 집 세 군데는 자식들과 합가하기 위해 집을 처분한다는 말대로 다들 괜찮은 조건이었다. 두 번째 집주인 할머니는 아들네 집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반인반신의 고장. 누군가는 비꼴만한 지역이었다. 사실 혁신도시와 공장이 들어선 그 지역을 그렇게 요약하는 건 지나치게 편리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반인반신하면 판 신 같은 어딘가 기묘하고 변태적인 느낌이 든다고, 중개인의 차에 타면서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동생과 엄마는 감탄했다. 그걸 보고 내 언피씨한 감수성은  ‘기독교 집안’의 산물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집을 보는 일은 피곤했다. 평상시에는 크래커나 씹고 냉커피나 마시면서 (숙취가 아니고) 숙취 같은 졸음을 쫓을 시간에 차를 타고 고만고만한 동네들을 돌아야 하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잠을 더 자야겠다, 아니 밥을 먹어야겠다, 했다. 잠을 제때 못 드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취침 전에 자꾸 요의가 생겨서 비뇨기과에 갔는데, 방광염이 아니라 심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이 생겨서 스트레스를 받는 애기들이 자기 전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는 거다. 더 이상 정신과 초진을 미룰 수 없었다. 질환을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진단하는 사람은 나였다. 왜 자살하면 안 된다는 거지? 요새 자주 생각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비용을 계산하고 사고를 당한 청소년들의 보험금을 계산하는 것으로 탄생이 빚과 동일시하는 나라에서 죽음으로 빚을 갚는 일을 염려하는 건 변태적이다. 마치 반인반신처럼. 갖춰서 못돼먹는 것도 못해서 위선이나 떠는 찌질함이다.      

  

나의 빚을 헤아려보자. 엄마는 자식 있으면 고생이라고,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미혼인 지인들을 위로하거나 기혼자 친지들과 유대감을 다졌는데 내가 있을 때라고 해서 말을 가리는 일은 없었다. 굴욕감을 맛본 나는 당신 같은 부모들을 내가 만나고 싶었겠냐고, 태어나는 건 고통일 뿐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상처를 되갚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어렸을 때 납치당할 뻔한 일을 상기해도 결혼 전 회사에서 남자 동료들과 척을 진 일을 말해도 무관심했다. 그녀는 내 존재 자체가 짐스럽다는 식으로 얘기했으니까. 별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당당하게. 내가 따져도 그게 사실인 걸 어쩌냐고 그랬으니까. 반대로 나는 집안일을 나눠서 맡고 월마다 주택 대출 상환금을 보탰다. 내가 부모의 짐이 아닌 걸 증명하고 싶었으며 싸울 때 너무 꿀리는 위치에 서기는 싫었다. 사실 그게 가사노동에 대한 페미니즘적 이해보다 먼저였다. 내가 예상한 대로 엄마가 내게 감격하는 일은 없었다. 돈을 낼 때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마워하긴 했지만 대개 일 끝나고 집에 올 때는 뭐가 되어있는지보다 뭐가 안되어있는지를 더 잘 알아차렸다. 예를 들면 밥 같은 것. 밥솥에 밥을 많이 하면 군내가 나고 밥이 굳으니 조금씩 자주 지으라는 얘기였다. 아버지 식사를 챙겨주지 않고, 그가 손수 밥을 차려 먹으면 그걸 가지고도 뭐라고 했다. 아빠 뒤끝을 어떻게 감당할래. 지적은 끝없다. 열 시 이후에는 방 불을 끄라고, 창문을 세게 닫지 말라고, 냉장고 문을 열지 말라고, 시끄럽게 걸어 다니지 말라고... 그런 것들. 내가 그걸 못하면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바로 옆에서 코를 골며 자거나 TV를 볼 때는 별 탈 없이 잠들었다.      

  

엄마와의 다툼은 ‘아버지와의 차별대우’라는 주제로 옮아갔다. 그래도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였는데 그녀에게 나는 경제적인 부담이자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경제적 조력자이자 선택한 파트너라는 거였다. 그래서 차별하는 거잖아. 나는 차별하지 말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인정이나 하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는 나한테 하는 것만큼 할 말 못 할 말 다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한테 하는 것만큼 했으면 어디 가서 무시당할 일이 없지. 상처 주려고 고르고 고른 말을 마구 던졌다. 그녀와 나는 서로의 ‘착함’을 보존하는 창고였다. 서로에게 착함을 최대한 아낌으로 남들에게 나쁘게 굴지 않을 에너지를 벌었다. 그 생각을 하면 ‘착함’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싶었다. 엄마보다 꽤 여러 사람과 갈등도 빚어봤고 더 다혈질적으로 굴었다고 해도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다들 나를 조금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고, 그 기원을 시작한 사람들이 내 부모였다. 나는 모두를 징벌하기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종종 바래왔다. 빚은 다 갚았고 너넨 이제 끝이야. 채권자 갑질도 끝이야. 뭐 그런 상상을. 종교적 믿음 정도가 상상에 빗장을 걸어둔 상태였다. 그걸 억압이라고 해야 할지 생기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좀 웃긴 건 그 역시 엄마의 유산이라는 거였다.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믿을 수 있다고, 사람을 의지할 순 없어도 하나님은 의지할 수 있다고. 그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사람에 엄마가 들어가는지 궁금하다. 엄마는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물론 짐과 빚인 나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나는 엄마에게 예수가 약속한 ‘가벼운 멍에’일까? 그것도 모르겠다.


중개인이 우리 대신에 계약금을 치렀다. 이것으로 우리는 더 깨끗한 집과 급한 빚을 해결할 (신용을 회복할) 돈을 얻었다. 어쩌면 존재의 빚을 생각할 만한 시간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이사 가고서 썼던 글.

작가의 이전글 잡지의 세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