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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Nov 26. 2023

거울 속의 나

한쪽만 남은 귀걸이들을 귀에 끼워보는 날이다.

친구는 내가 귀걸이를 한쪽만 차고 나왔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때 너는 참 ‘히피 같았다’고 했다. 그 모습을 히피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군. 모자라 보이는 게 아니고? 원색의 꽃무늬 블라우스에 통 넓은 바지 차림이기까지 했는데. 어디 가면 옷을 못 입었다고 잔소리 들을 만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새삼 그가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대충 화장한 상태에서 패딩을 껴입다 옷에 파운데이션이 묻어서 닦아내야 했다든가, 청바지 기장 때문에 밑단을 늘 어설프게 롤업하고 다닌다든가. 카라티가 좋아서 색만 다른 카라티를 일주일 내내 돌려가며 입고 다닌다든가. 다른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냈던 내 모습들을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말쑥한 옷차림에 재주가 없다. 옷차림이 너무 어설퍼서 오늘과 내일의 사정이 다 드러나 보인다. 세탁기를 돌리고 나니까 남는 상의가 얼마 없다, 쇼핑몰과 수선집에 갈만한 심적인,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의류라는 소비 품목을 바라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심미안도 없다. 등등. 잘 고른 옷은 나의 경제적인 형편과 심리 상태와 사회와의 친화력 등을 미화한다. 쪼들려도 쪼들린 게 전시될 위험이 없고, 마음이 무거워도 쾌활한 척, 적당히 사회가 바라는 미적 기준을 인정하는 상식적인 사회인인 척할 수 있다. 이렇게 그럴듯하고 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패싱’할 수 있다는 거지. 불행하게도 나에겐 먼 이야기지만.      


옷차림과 화장에 대한 여러 말들이 많이 오고 간다. (예를 들면 ‘코르셋’과 ‘탈코르셋’ 같은) 잘 꾸며놓은 모습이 가정하는 ‘정상성’이 너무 편협하고 개성이 없다는 말들. 그 정상성과 튀지 않음, 거칠지 않음, 세련됨이 어떤 긴장을 담고 있는지 응시하고 싶다. 같은 옷을 너무 돌려 입거나 다소 저렴해 보이는 옷을 지적하는 시선에는 계층에 대한 차별 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입으면 빈티가 나그래서는 안 되지.) 남자가 어떤, 어떤 옷을 입으면 ‘게이’스러우며, 반대로 여자가 톰보이 같이 입으면 ‘레즈비언’ 아니냐는 눈초리는 또 어떤가. 유명인사의 패션을 따라 하면 철없이 연예인에나 열광하는 가벼운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다고 아예 신경 안 쓰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같다. 그러니까 튀지 않고 세련된, 중도를 지키는 패션이란 사회가 대놓고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제거하고 얻어낸 순도 높은 금과 같다. 거기엔 차별 의식이 고밀도로 함유되어 있다. 


지나치게 ‘용모 단정’을 강조하는 태도는 ‘나’라는 사람의 개성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도 나쁘지만, ‘나’와 함께 이런 타자들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점에서도 좋지 않다. 누가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겠냐마는 딱히 대단한 무게도 없이 건네는 말을 위해서 ‘언제나’ 정상성을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언제나 정상성에 반항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처럼!) 딱 봐도 허술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촌스럽다’고 먼저 생각할 만큼 패션의 대외 규칙을 가슴 깊이 새겨놓을 필요도 없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내가 좀 더 못생겨 보이는 날이지만, 그냥 ‘못생겼다’는 생각조차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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