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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못지 않은 장기요양 등급신청현장

by young

저희 센터에 오랜만에 새로운 가족이 등급 신청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가족분들은 비장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치매가 좀 있으시고 평소에 잘 걷지도 못하세요. 혼자 계시면 위험해서요. 꼭 등급이 나와야 해요”


저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응대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긴장을 했습니다.
바로 '방문조사'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장기요양등급은 신청만 한다고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파견된 조사원이 신청자의 집에 직접 찾아가 실제로 일상생활이 어려운지를 확인하는 방문조사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어르신들이 이 방문조사의 벽을 넘는게 생각보다 어렵다는 겁니다.


보통 방문조사 날짜가 잡히면 며칠전부터 일종의 리허설을 진행합니다.


“어머니, 조사원 오시면 모른다고 하셔야 해요. 주민등록번호 물어보면 ‘몰라요~’ 하셔야 해요.
그리고 걷는 것도 서툴게 걸으셔야 해요. 알겠죠?”


괜한 걱정에 어느 가족이나 조사 전에 하는 리허설 대사입니다.


어르신들은 ‘등급을 받아야 돌봄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선 다들 결연한 의지를 보이십니다.


그런데 막상 조사원이 방문해 어르신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어르신, 팔 좀 들어보실래요?"


조사원의 말에 평소에는 세수도 도와드려야 했던 분이 번쩍 팔을 드십니다.

허리를 제대로 못 펴신다고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시기도 합니다.

치매로 자녀의 이름도 헷갈려 하시던 분이 조사원 앞에서는 자녀분의 생일까지 줄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정도 되면 옆에서 가족들이 안절부절하며 "평소에는 저렇게 못하시는데.."라고 말을 해도 조사원의 메모와 함께 등급은 물건너 가버립니다.


갑자기 어르신들에게 무슨 힘이 생긴걸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가족들과 말은 잘 해두었지만 막상 조사원이 요청하면 자존심 때문에 '내가 이정도도 못할까봐?' 하면서 억지로 수행하는 경우도 있고 조사원을 마치 본인을 조사하는 높은 직책의 공무원처럼 생각해서 더욱 ‘제대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등급을 받기 위해 뭐든지 모른다고 하거나 누워만 있는 등 과하게 못하는 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르신,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럼 어르신 생신은 언제세요?”
“그런 것도 몰라요...”


하지만 경험이 많은 조사원들은 이 어르신이 진짜로 모르는 것인지 아는데 모르는 척하는건지 대충 눈치를 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르신이 아는데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 어르신~ 조사는 다 끝났구요. 저희가 공단차원에서 지금 등급 신청하는 어르신들께 사은품을 드리는 이벤트가 있어요. 여기 종이에 주소 적어주시면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그러면 방금 전까지 “나는 몰라요”를 반복하던 어르신이 얼씨구나하며 반듯한 필체로 주소를 적어줍니다. 조사원의 유도신문에 제대로 걸려버린겁니다.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못한다고 하는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조사원들이 종아리를 만져보기도 합니다.

정말 못 걷는 어르신들은 종아리에 근육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만졌을 때 탱탱한 근육이 만져지면 걸을 수 있는데 못걷는 척 연기를 한다고 판정해버립니다.

요즘은 인터넷에 “장기요양등급 잘 받는 법” 같은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가족들 중에는 그런 것들을 참고해 대본을 아예 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머니, 치매 질문 나오면 ‘모르겠어요’, 걷는거 물어보면 ‘지팡이 없으면 못 걸어요’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문제는 치밀하게 준비를 해도 긴장한 어르신들이 실제 상황에서는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아세요?”
“지팡이 없으면 못 걸어요.”
“..네?”


이쯤 되면, 연습이 오히려 더 독이 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실제로 정말 등급이 필요한 분인데 방문조사 당일에만 유독 컨디션이 좋아지시거나 연기를 너무 심하게 하시다가 조사원이 눈치채고 불승인이 나는 경우입니다.


방문조사라는 절차는 안타깝게도 그날의 점수만을 숫자로 기록하기에 숱한 시간을 견뎌온 한 사람의 생을 다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 점수에는 지키고 싶은 자존심도 있고 세상을 향한 마지막 방어막 같은 ‘괜찮은 척’도 있습니다.


가끔 방문조사에 동행하다보면 딱 ‘현실극장’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어르신은 주연이 되어 대사를 하시고, 가족은 조연으로 표정 연기를 하고, 조사원은 감독이 되어 가끔 NG를 외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대부분 비슷하게 끝납니다.

“어르신, 팔 좀 들어보시겠어요?”


어르신은 씩 웃으며 팔을 번쩍 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팔하나 못들까봐!”


짧은 탄식과 함께 우리는 또 다음 무대를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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