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더운 여름 날에 한 할머니께서 방문요양신청을 하셔서 어르신댁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신체나 인지기능이 크게 나쁜 편도 아니었고 요구사항도 크게 없는 무난한 어르신이셔서 요양보호사도 쉽게 구해 서비스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때 요양보호사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센터장님, 어르신이 천장에 뭐가 있다고 계속 얘기를 하시는데 센터장님이 오셔서 한번 이야기를 들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어르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되는 마음에 달려가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밤마다 천장 위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나를 약 올리려고 하는지 딱 10시만 되면 뉴스 소리, 웃음 소리 그리고 음악 소리도 들린다니까?"
"천장에서 라디오 소리요..?"
어르신댁은 단층 단독주택이라 위에 누가 살고 있지도 않았기에 저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누가 어르신댁 지붕 아래 라디오를 숨겨놓고 굳이 밤 10시마다 또 굳이 원격으로 라디오를 켜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저의 의아한 표정을 보고 어르신은 벌컥 화를 냈습니다.
"오늘 10시에 같이 들어보면 내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겠네!"
어르신의 호통에 꼼짝없이 같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 저는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주변 집 소리를 착각하신게 아닐까?
어르신이 초기 치매 증상이라 빨리 도와드려야 하는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점점 저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귀신 소리는 아닐까?
3년전 돌아가셨다던 남편분의 목소리일까? 이 집에 살던 예전 사람의 목소리일까?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슬슬 긴장되었습니다.
전기세를 아끼려 TV 외에는 집 안에 어떤 빛도 없는 컴컴한 어르신댁에서의 밤은 유난히 더 무서웠습니다.
9시58분.. 59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시계만 바라보던 저는 10시가 되자 눈을 꼭 감고 청각에 모든 집중을 모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밖에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나 일상적인 소음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어르신이 외쳤습니다.
"이거 봐! 소리 들리지?"
어르신은 지금 라디오에서 뉴스 방송이 나오고 있다며 잘 들어보라고 했지만 제 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지금 아무 소리도 안나는데요..."
"뭐? 젊은 사람이 벌써 귀가 먹었나! 당장 나가!"
어르신은 화를 내며 저를 집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저의 못미더운 반응에 더 자극이 되셨는지 다음날 어르신은 기어코 사람을 불러 천장에 구멍을 뚫고 말았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천장에서 라디오를 찾으려 의자에 올라갔던 어르신은 발을 헛디뎌 고관절이 골절되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괜히 제 반응 때문에 어르신이 다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병문안을 갔을때도 어르신은 천장에 라디오가 있는데 그 소리가 왜 안들리냐는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어르신을 뒤로 한채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문득 예전에 같이 탁구를 쳤던 어르신 생각이 났습니다.
(이전 글 : 02화 세상에 나쁜 치매는 없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어르신들의 말을 판단하고 사실 여부를 가리는데 집중한 것을 깨닫고 자책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필요한건 판단이 아니라 이해와 공감인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한달 가량이 지나 어르신의 퇴원을 도와드릴때 저는 미리 인터넷에서 주문한 소형 라디오를 주머니에 숨겨 두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어르신은 저기서 라디오를 꺼내야 되는데.. 하며 하염없이 천장을 쳐다보셨습니다.
저는 슬쩍 어르신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습니다.
"어르신, 제가 한번 올라가서 볼까요? 제가 눈이 좋아서 잘 발견할 수 있을거 같은데요"
어르신은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의자 위에 올라가 천장을 살펴보는 척하며 어르신이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라디오를 꺼내 천장 위에 재빨리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놀란 목소리로 천장 위에서 라디오를 꺼내며 소리쳤습니다.
"어르신, 찾았습니다! 이 라디오 맞죠?"
어르신은 눈이 동그래지더니, 벌떡 일어나 다가오셨습니다.
라디오를 받은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 번졌습니다.
“이거였구나... 진짜 있었네. 내가 나이 먹고 괜히 헛소리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 어르신은 더 이상 라디오 소리가 안 들려서 푹 잔다고 했습니다.
요양보호사에게도 요즘은 조용해서 좋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보호자 신분이던, 외국에서 사는 따님이 잠깐 귀국했을때 이 이야기를 해드리자 그 분은 깜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는 종종 라디오를 틀어놓고 소일거리를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라디오 소리 때문에 드라마를 못보겠다며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크게 화를 내셨대요. 그래서 돌아가신게 당신 탓이라면서 자책을 계속하셨어요. 아마 그 때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거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환청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어르신이 짊어진 마음 한 켠의 짐이자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보는 건 단순히 노인들의 몸 뿐만이 아니라 약해지고 무거워진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도.
그리고 저는 오늘도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돌봄이란,
어르신 마음의 불안을 꺼주는 스위치를
하나하나 눌러드리는 일 아닐까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