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주간보호센터 어르신들은 대부분 투표를 하시길 원하지만 거동이 많이 불편하거나, 치매로 인지가 떨어지신 분들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투표를 못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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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사정이 되어서 투표하러 가시는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계시는 분들을 위해 센터장으로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날 회의시간, 선생님들께 1년에 한번 센터 대표 요양보호사를 뽑는 우리만의 작은 선거를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당선된 선생님께는 게시판에 “올해의 요양보호사” 상장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고 우수직원 뱃지를 유니폼에 달고 일할 수 있게 해주며 마지막으로 백화점 상품권 20만원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우수직원 뱃지 이야기때 까지만 해도 딴청을 피우던 선생님들이 백화점 상품권 이야기와 함께 눈빛이 바뀌며 너도나도 후보를 자청했고 모든 선생님이 후보자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만의 작은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도 이번 선거의 취지와 진행 일정을 말씀드렸고 다들 하나같이 대통령을 뽑는 듯한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르신들의 반응에 작은 이벤트처럼 진행하려던 계획을 실제 선거와 유사하게 형식을 갖추는 것으로 급히 바꿨습니다.
어르신들 앞에서 선생님들이 각자 공약발표를 하고 일주일간 유세기간을 거쳐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후보 합동 공약발표를 하기로 한 날, 생각보다 철저한 준비를 해온 선생님들을 보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A4용지 가득 연설문을 준비해온 선생님도 있었고, 연설보다는 어르신들께 어필할 수 있는 익살스러운 가발 등으로 분장에 신경쓴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후보자들이 한명씩 공약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매일 아침 어르신들이 들어오실 때, 무조건 안아드리겠습니다!"
"제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떡을 돌리겠습니다!"
"제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간식시간에 매일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제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매일 30분 이상 산책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단체로 해외여행' 등 공수표를 남발하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어르신과 선생님들의 야유 속에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모든 공약 발표가 끝나고 이제 유세기간에 접어들었습니다.
센터 벽 빈공간에 선거 벽보처럼 선생님들의 얼굴과 이름, 공약들을 적어 게시했습니다.
일개 센터 안에서 진행되는 작은 선거이지만 정말 우리가 선거 기간에 목격하는 다양한 일들이 그대로 벌어졌습니다.
일하는 중간에 어르신들께 가서 안마를 해드리며 안부를 물어보며 본인을 각인시키는 후보가 있는가 하면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본인의 기호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유세하는 후보도 있었습니다.
괜히 어르신들 식사 시간에 함께 하며 앞으로 센터가 다 잘될꺼라며 다독이는 후보도 있었습니다.
어떤 후보는 어르신들 주머니에 사탕 찔러넣기를 하다 다른 후보자에게 걸려 후보 자격을 박탈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후보들은 서로 작당모의를 해서 단일화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하나같이 누군가들이 떠오르는 선거 활동들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서로 어떤 후보자들의 공약이 가장 현실적이고 마음에 드는지 서로 의견도 교환했고 때로는 작은 말다툼까지 일어날 정도로 선거에 대한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요양보호사들이 후보 등록을 했지만 단일화, 후보 자격 박탈, 자진 포기 등으로 최종적으로 3명만이 마지막까지 완주를 약속했습니다. 그 분들은 자청해서 토론회를 하고 싶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후보자들도 유권자들도 신난 이벤트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습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저의 사회로 진행된 후보들의 토론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00후보님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당선 시 상품권 센터 환원을 공약하셨던데 며칠전에 본인 쇼핑 리스트를 만드는걸 목격한 분이 있습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완벽한 허위 사실입니다. 쇼핑 리스트 작성 사실도 없고 상품권 센터 환원은 무조건 지킬 예정입니다.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00 후보님 최근 한달 간 어르신께 컴플레인을 2회 이상 받은걸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센터 대표 요양보호사로서는 치명적인 부분 아닐까요?"
대한민국 선거 기간동안 진행된 토론회를 자주 보던 저로서는 강한 기시감마저 들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었지만 다행히 서로에 대한 비방이나 비난은 화두 정도로 그치고 다들 유머와 어르신들을 위한 공약 안내로 토론회를 채웠습니다.
일주일 간의 치열한 유세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투표날이 되었습니다.
바퀴가 달린 낮은 책상에 작은 칸막이를 덮어 씌우고 어르신 한분한분께 후보자들의 얼굴과 이름, 기호가 적혀 있는 투표용지를 드리면 어르신들이 원하는 선생님에게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비록 이벤트성 선거이자 투표였지만 어르신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셨습니다.
모든 어르신들의 투표가 끝나고 저는 어르신들이 보는 앞에서 투표함을 열고 개표를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누가 당선된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개표가 진행될 때마다 후보자들의 표정에 다들 깔깔 웃고 “저 선생님 내가 찍었어!” 자랑하는 어르신들 모습에 센터 전체가 환해졌거든요.
우리나라의 노인주간보호센터는 센터가 정한 하루의 일과에 따라 흘러갑니다.
오전, 오후 프로그램과 점심식사, 간식까지 모두 어르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희가 진행한 작은 선거는 말그대로 작은 이벤트에 불과했지만, 어르신들께는 오랜만에 ‘내가 직접 고르고 선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행사한 한 표에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전할 수 있다는 뿌듯함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작지만 큰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웃음과 마음이 함께 쌓이는 그 자리에, 늘 어르신들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