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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캐러 갔다가 인생을 배웠습니다.

by young

추운 겨울이 지나고 꽃들이 삐죽이 머리를 내미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춘곤증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쯤, 대표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올해도 어르신들과 나들이 한번 가야지. 이번엔 쑥을 캐러 가면 좋겠어요."


대표님의 아는 지인 땅에 쑥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매년 어르신들과 쑥을 캐러 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쑥을 손으로 뽑는 게 아니고 칼이나 낫 같은 걸로 베어서 캔다는 말씀을 듣고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혹시나 어르신들이 칼같이 날카로운 물건을 쓰시다가 다치시면 어떡하지?'


하지만 대표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매년 갔던 곳이에요. 다들 전문가처럼 잘하신다니까요."


그래도 제 마음은 끝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간호사 선생님께는 응급키트를 잔뜩 챙겨달라고 부탁드리고, 요양보호사 선생님들께는 어르신들 곁을 꼭 지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드디어 나들이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조리사 선생님은 소풍 분위기를 위해 김밥과 따뜻한 국을 정성껏 준비하셨습니다.
어르신들도 각자의 손에 가방 하나씩 들고 오셨지요.
그 안에는 보호자분들이 챙겨준 간식과 쑥을 캘 도구인 장갑, 신문지에 꽁꽁 싸져있는 칼이나 낫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의 스타렉스는 마치 봄을 가득 실은 버스 같았습니다.
창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고, 어르신들은 트로트 리듬에 맞춰 손뼉을 치셨습니다.
서로 나눠먹는 간식 냄새와 웃음소리가 섞여, 모두가 한 장의 추억처럼 어우러졌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산자락 아래로 초록빛 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와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어르신들이 다니실 구역 둘레를 끈으로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쑥 캐기 시간.

어르신들은 주저 없이 자리로 향했습니다.

낫을 들고 허리를 숙이시더니, 마치 오래 기다린 친구를 만난 듯 능숙하게 쑥을 베어내셨습니다.

그 손놀림은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었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은 그 곁에서 바구니를 들고 어르신들이 캐는 쑥들을 정신없이 받아내었습니다.


어르신들의 쑥 캐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재미있어 보여서 슬쩍 어르신 곁으로 저도 가서 한번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흔쾌히 낫을 건네주셨습니다.


낫을 자세히 보니 많이 위험하지 않게 무뎌져 있는 낫이었습니다.

다른 어르신들 칼과 낫도 마찬가지로 보호자들이 무딘 것들로 챙겨주셨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습니다.


호기롭게 낫을 들고 쑥을 캐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서툰 손동작으로 쑥을 캐니 주변 어르신들의 호통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아니, 그렇게 너무 위를 자르면 안 돼! 땅에 딱 붙여서 아래쪽을 잘라야지."


"그건 쑥이 아니야! 잘 보고 잘러!"


결국 몇 번의 낫질 끝에 다시 어르신께 낫을 돌려드리고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어르신들의 건강과 컨디션 예방 차원에서 쑥을 오래 캐지는 않았지만, 제 생각보다 엄청난 양의 쑥이 바구니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점심으로 김밥을 드시며, 본인이 쑥을 얼마나 많이 캤는지 마치 개선장군처럼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쑥을 다 캐고 돌아온 다음날, 조리사 선생님은 그 쑥으로 국을 끓이셨습니다.
솥뚜껑을 여는 순간, 봄이 한껏 끓어오르는 듯한 향이 퍼졌습니다.

남은 쑥을 가지고는 방앗간으로 가서 쑥떡을 만들어 어르신들과 나눠먹었습니다.

어르신들은 본인들이 캔 쑥으로 국과 떡을 해 먹는다는 생각에 평소보다도 더욱 맛있게 드셨습니다.


우리가 '노인'을 이야기할 때면 흔히 도움이 필요한 존재,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배웠습니다.


삶의 경험은 그 어떤 교과서보다 지혜롭고, 손끝의 기억은 여전히 세상을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걸요.


그리고 어르신들은 우리가 돌봐야 할 ‘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일구고 있는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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