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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 건넨 하얀 커피의 정체

by young

치매 어르신에게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로 '섭식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식을 계속 먹으려는 폭식증, 반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는 거식증, 그리고 음식이 아닌 것을 먹는 이식증.
이 세 가지를 통틀어 ‘섭식장애’라고 부릅니다.


폭식증을 보이는 어르신들은 기억력 저하로 방금 식사한 사실을 잊거나, 대뇌 손상으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계속 식사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식사 후에는 빈 그릇을 그대로 두어 식사를 하셨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거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하고, 심할 경우에는 가벼운 간식을 드리며 안정시키기도 합니다.


반대로 음식을 거부하시는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라면 하루쯤 굶는다고 큰 문제가 없지만, 어르신들은 다릅니다.
하루 세끼 중 한 끼만 거르셔도 신체와 인지 기능이 눈에 띄게 저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왜 식사를 거부하시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게 중요합니다.
입안의 상처, 삼킴 장애, 식욕 저하, 혹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식증은 인지 저하로 인해 이것이 음식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면서 생기는 증상입니다.
손에 잡히는 걸 그대로 입에 넣으시기 때문에 건전지나 날카로운 조각 같은 위험 물질을 삼키기도 하기 때문에 특히 이식증이 있는 어르신은 주의 깊게 관찰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이식증을 겪던 어르신입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어르신들도, 직원들도 모두 차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상하게 불안했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현장 경험상, 너무 평화로우면 꼭 뭔가가 터졌거든요.


점심 식사 후, 불안한 마음에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생활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는데 한 어르신이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에 무언가를 타고 계셨습니다.
그러더니 다른 어르신께 그 컵을 건네며 미소를 짓는 겁니다.

멀리서 볼 땐 커피를 타드리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컵 속의 물 색깔이 커피의 진한 갈색 대신, 뿌옇고 탁한 하얀색이었습니다.

그 액체의 정체는 바로 어르신들을 위해 비치한 핸드크림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저 핸드크림 커피를 강제로 뺏으려고 하다가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웃으며 어르신께 말을 걸었습니다.


"어르신, 그거 맛있어 보이는데 제가 마셔도 될까요?"


어르신은 잠시 망설이셨지만, 저의 간절한 눈빛이 통했는지 이내 저에게 그 핸드크림커피를 건네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건네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요양보호사 선생님께 다른 어르신의 핸드크림커피도 회수를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일단락이 되는 줄 알았는데, 어르신이 저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어르신께 여쭤보았습니다.


"어르신,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맛있어 보인다며. 얼른 마셔봐."


아뿔싸.

저는 가만히 컵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하얀 액체들이 둥둥 떠다니며 제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아.. 어르신. 사무실 들어가서 마시면 안 될까요?"


저의 간절한 부탁에도 어르신은 완강했습니다.


"아니 여기서 한 모금만 마셔보고 들어가. 정말 맛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사면초가.

진퇴양난.

고립무원.


빼도 박도 못하게 그 핸드크림커피를 마셔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커피를 마시는 척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꾹 다문 입술 사이로 불쾌한 로션맛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제 대답을 기다리는 어르신의 표정을 보면서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맛있다고 해야 할까? 맛없다고 해야 할까?

맛있다고 극찬을 해버리면 다음에 또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거나 다른 어르신들께 또 권할 수 있고, 그렇다고 맛없다고 해버리면 어르신이 화를 내시거나 아니면 또 다른 레시피를 찾아 참신한 커피를 만들어 내실 수도 있는 노릇이었습니다.


"음.. 어르신 이건.. 아주.. 새로운 맛이네요."


"새로운 맛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처음 먹어보는 맛이네요. 건조한 제 입술이 촉촉해지는 거 같아요."


다행히 어르신은 더 이상 추궁하시지 않았고, 저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어르신과 다른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중간중간 그 핸드크림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요.


감사하게도 지나가던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저의 곤란한 표정을 보고는 재빨리 다가오셨습니다.


"아이고, 어르신! 센터장님은 바쁘신 분이라서 이렇게 계속 잡아두시면 안 돼요. 저랑 같이 저기 가서 어제 못했던 색칠마저 할까요?"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어르신을 유도하여 프로그램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렇게 어르신의 마수에서 벗어난 저는 사무실로 돌아와 보호자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보호자님, 조금 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혹시 집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있으신가요?"


돌아온 보호자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네.. 안 그래도 집에서도 가끔 제가 안 볼 때 주방에 들어가셔서 주방세제 짜서 드시고 그러세요. 일단 놀라서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건강에 크게 문제는 없으시대요."


집에서 발현되었던 이식증이 이제 센터에 와서도 증상을 보이시기 시작했던 겁니다.


저는 그날 저녁, 선생님들과 함께 기관의 환경을 전면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르신 손 닿는 곳에는 식음 가능한 것만 두고, 생활용품은 모두 잠금장치가 있는 캐비닛으로 옮겼습니다.

핸드크림이나 손소독제 같이 자주 사용해야 하는 물건들은 사무실로 다 옮겨놓고 필요할 때마다 사무실에서 선생님이 가져가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또, 어르신이 안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담당 요양보호사가 식사 후 일정 시간은 곁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산책이나 가벼운 활동 등을 통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했습니다.


그 후로 며칠간은 어르신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다행히 더 이상 위험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고, 어르신도 어느새 정수기 앞보다는 프로그램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며칠 뒤, 어르신이 저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종이컵을 하나 건네셨습니다.
저는 순간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그 안에는 따뜻한 보리차가 담겨 있었습니다.


"어르신, 정말 구수하고 맛있네요!"


어쩌면 어르신은 단지 커피를 타신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네고 계셨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하얀 커피를 타주던 마음만큼은 진짜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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