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요양기관은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큰 이벤트가 있습니다.
바로 '평가'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 평가기간 동안 기관을 직접 방문하여 지난 3년간의 서류 검토, 현장 실사, 직원 및 이용자 상담 등을 통해 점수를 매깁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기관은 A부터 E까지 5개 등급으로 분류됩니다.
평가 점수가 높을수록 이용자가 장기요양기관 검색 시 상위에 노출될 수 있도록 하고, 특히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기관은 가산금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낮은 등급을 받을수록 이용자들이 잘 찾아볼 수 없게 만들고, E등급을 받으면 수시평가대상이 되어 재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연속으로 E등급을 받으면 지정 갱신이 거부되어 폐업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평가 기간이 다가오면 장기요양기관들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움직입니다.
제가 주간보호센터에서 월급 센터장이 된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그 공포의 평가 날짜를 통보받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그 일주일 안에 평가 기준을 모두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평가매뉴얼을 꺼내 들고 1번 지표부터 보며 점검하는 내용들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평가 항목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① 서류는 잘 작성되어 있는가
② 시설 환경은 청결하고 쾌적한가
③ 직원들은 교육이 잘 되어 있는가
④ 이용자들은 서비스를 잘 받고 있는가
평가 항목을 파악한 저는 사회복지사에게는 서류 점검을, 요양보호사에게는 시설 청결을, 조리사에게는 주방 청결을 지시했고, 저는 공단에서 질문할 예상 질문들을 뽑아 직원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퇴근을 반납한 채 사회복지사와 밤늦게까지 서류를 보고 있는데, 퇴근했던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어느새 돌아와 서류검토하는 것을 돕겠다고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그 모습이 정말 고마웠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상황이었는데, 다들 한마음으로 기관을 위해 남아준 것입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평가 당일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마지막 점검을 위해 기관을 둘러보던 저는 주방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싱크대, 환풍기, 바닥타일 등등 주방의 모든 것들이 새것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조리사 선생님께서도 전날 밤늦게까지 남아 청소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기관의 청결한 모습과 직원들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여 예상 질문지들을 외우는 모습을 보며 충분히 A등급을 받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산금까지 받아 직원들과 즐겁게 회식하는 모습까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10시쯤 되자, 드디어 공단 직원 2명이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평가가 시작된 겁니다.
오전에는 내내 사무실에서 서류를 검토하였고, 오후에는 현장실사와 상담이 진행되었습니다.
서류에서 몇 가지를 지적받았지만 크게 점수를 잃지는 않았고, 오후만 어떻게 잘 넘어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현장실사.
그들이 처음 방문한 곳은 프로그램실이었습니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공단직원은 이내 책장 위에 올려져 있던 가위 한 자루를 발견했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오후 프로그램을 준비하다가 서랍 위에 잠시 올려두고 그대로 까먹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런 위험한 물건이 이용자 손 닿는 곳에 있으면 어떡합니까?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잖아요."
공단직원은 굳은 얼굴로 저에게 그렇게 지적하며 채점표 어딘가를 끄적였습니다.
당황한 저는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오늘 다들 긴장해서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얼버무려봤지만 이미 채점표에는 빗줄기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방문한 곳은 주방이었습니다.
반짝거리는 주방을 본 공단직원도 주방이 엄청 깨끗하다며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긍정적인 표정으로 주방을 둘러보던 공단직원은 냉장고를 열어보았습니다.
깔끔히 정돈된 냉장고에서 식품들을 살펴보던 공단직원이 갑자기 멈칫하더니 작은 소스통을 꺼냈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돈가스소스,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났네요?"
공단직원이 저에게 보여준 소스통을 자세히 보니 유통기한이 한 달이나 지나있었습니다.
얼마 전 조리사 선생님이 직원들 간식을 해주려다 못 써서 그대로 두었던 소스였습니다.
저는 예전에 직원들 간식에 쓰려고 샀던 것이고,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공단직원은 원칙상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유통기한 지난 게 나오면 위생점수는 0점으로 처리가 된다고 차갑게 이야기했습니다.
조리사 선생님이 청소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결국 현장실사에서 탈탈 털렸던 저희 센터는 결국 기대했던 A등급 대신 B등급을 부여받았습니다.
A등급을 기대하며 밤낮으로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았지만, 막상 점수를 받아 든 순간 이상하게도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았습니다.
가위를 깜빡한 요양보호사 선생님도,
소스 날짜를 놓친 조리사 선생님도,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가가 끝난 뒤, 센터 문을 닫고 불을 끄는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우린 정말 열심히 했다.'
그 생각 하나로 충분했습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함께 버텨준 직원들,
야근을 함께하며 서로의 손을 잡아주던 순간들,
그게 진짜 A등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의 우리는 비록 B등급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진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