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채로 신혼여행을 갔다 온 저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취업을 위해 워크넷을 뒤적거리는데 제가 원하던 종합복지관이나 사회복지법인의 구인공고는 보이지 않았고, 그 시기 즈음에 제일 많이 보이던 구인공고가 바로 '재가복지센터'였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사회복지실습을 재가복지센터로 가기도 했고, 일단 어떤 일이든 취업을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가까운 재가복지센터의 구인공고에 지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제의가 와서 재가복지센터를 방문했는데, 이력서를 보시던 대표님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아니, 사회복지사 1급이시네요?"
사회복지사 1급이 기본이던 복지관과는 달리 재가복지센터의 센터장, 사회복지사는 거의 대부분이 사회복지사 2급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장기요양기관이 각광받으며 너도나도 장기요양기관설립에 관심을 가졌는데, 장기요양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가 사회복지사 2급 이상이다 보니, 사이버대학이나 2년제 대학 등을 통해 빠르게 자격증을 취득해 설립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사회복지사 2급만 있어도 설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1급까지 시험을 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또, 당시 장기요양기관의 사회복지사들은 대다수가 최저 임금 수준이어서 사회복지사 1급을 취득한 사회복지사들이 굳이 재가복지센터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름 수월하게 재가복지센터에 취업을 해서 일을 하다 보니 제가 재가복지센터, 특히 주간보호센터와 잘 맞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운전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주간보호센터의 경우에는 어르신 유치원이라는 별명답게 어르신들을 아침에 모시고 오고 저녁에 모셔다 드리는 일명 '송영'이라는 것을 반드시 하게 되는데, 유치원처럼 운전원들이 다 운전하는 것이 아니고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 간호조무사 너나 할 것 없이 운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센터장까지도 운전을 담당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통 주간보호센터에서는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를 채용할 때, 운전이 가능한 사람을 우선 채용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주간보호센터의 차들은 대부분 스타렉스 같은 큰 차들이기 때문에 큰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욱 환영합니다.
아마 제 지난 브런치북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기억하실 겁니다.
저는 첫 직장에서 곡예와 가까운 운전을 해야 하는 곳이었고, 트럭과 스타렉스 같은 큰 차들을 주로 운전했다는 것을요.
첫 직장에서 스타르타식으로 배운 운전 덕분에 스타렉스로 어르신들을 송영하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주간보호센터와 잘 맞았던 저의 능력은 어르신들과 잘 지낼 수 있는 친화력이었습니다.
주간보호센터의 특성상 직원들이 하루 종일 어르신들과 있어야 하고, 프로그램도 진행을 하거나 참여를 해야 됩니다.
앞에 나가서 춤을 춘다거나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도 생기고, 프로그램을 할 때는 참여유도도 하고 분위기도 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위에서 말한 운전 실력 외에도, 내성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을 직원으로 선호하는 센터장들이 많습니다.
저도 사실 MBTI를 해보면 매번 INFJ가 나오고,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집에서 에너지를 충천하는 걸 선호하는 극내향인이었지만, 군대와 2번의 직장을 거치며 차츰 외향적으로 변했고 우연히 친구들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면서 남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공포심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들 앞에서 많이 까불기도 하고, 트로트도 외워서 불러드리고, 어버이날 같은 행사를 하게 되면 가발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앞에 나가 진행을 하며 어르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또, 지금은 남자 요양보호사나 남자 사회복지사도 많이 생겨났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등을 교체한다거나 컴퓨터나 기계 같은 것이 고장 났을 때, 힘을 써야 할 때 남자인 제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직원들 사이에서도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장기요양기관도 서류 업무들이 많았지만, 복지관이나 사회복지법인에서 하는 서류업무에 비하면 굉장히 수월했기 때문에 업무적으로도 크게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를 가장 크게 바꿔놓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있는데, 밖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보니, 요양보호사 선생님들이 남자 어르신 한 분을 둘러싸고 등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어르신의 얼굴이 파래져있고 목을 감싸 쥐고 계셨습니다.
식사를 하시다 계란말이가 기도를 막아 기도 폐쇄가 온 것이었습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어르신을 뒤에서 붙잡고 명치를 강하게 밀어 올리는 하임리히법을 시행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하자 다행히도 계란말이가 튀어나오며 그제야 어르신이 숨을 쉬기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어르신과 보호자께 정말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받았고 이 일로 난생처음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우수종사자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앞선 직장들에서 항상 혼만 났던 제가 이곳에서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끼니 굉장히 뿌듯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가복지센터에서 처음으로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단순히 제 역할을 다하는 차원을 넘어, "이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제게 큰 위로이자 동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비로소 사회복지사의 ‘맛’을 제대로 느낀 것 같습니다.
단순히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르신들과 함께 웃고 울며 하루를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사회복지사로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것만 같았던 재가복지센터에서도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