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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n 23. 2023

아빠에게,

시골집에 세 자매와 함께 사는 엄마의 배가 만삭이다.
힘든 몸으로 생계까지 책임지면서 7살 5살 3살 아이까지 돌보는 것이 고된 일이지만, 멀리 외국에 돈 벌러 간 아이들 아빠를 생각하면 말이라도 통하는 곳에서 몸이 힘든 건 대수롭지 않다.

아이들 목소리라도 들으면 머나먼 타국에서 힘이라도 날까 싶어, 카세트녹음기를 빌려왔다. 비싼 카세트녹음기가 아이들 손에 망가지면 어쩌나,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혹여라도 아이들이 손이라도 대서 잘못될까 봐, 만지지 말라고 엄하게 충고했다. 그러자 빨간 내복을 입은 세 자매가 신기하기 그지없는 카세트녹음기를 말똥거리는 눈으로만 관찰하고 있다.
자기 말을 잘 따라주는 아이들 모습이 귀엽고 예쁘기도 하고, 만지고 싶은데도 자신들 것이 아니기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만 보는 것이 짠하다.
 
여러 번 설명을 들었지만, 좀처럼 작동이 쉽지 않다. 테이프의 방향을 재차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는 동작을 연습하기도 하고, 혹시라도 말소리가 잘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 비싼 카세트녹음기를 조심스럽게 들어서 아이들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대는 사소한 동작까지 연습하고서야 녹음 작업을 진행한다.
 
아이들에게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라고 일러두고, 두 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고 첫째에게 말을 하라는 눈치를 주지만, 다들 처음인 일에 서로 얼굴만 보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다.
 
“말하그라, 여 말하믄 아부지가 듣는다.”
“참말이가. 여따 말하믄 아빠가 듣나?”
“하모, 테잎 닳는다 퍼득 말해보그라.”
멀뚱 거리는 여러 개의 시선이 카세트녹음기로 모아진다.
 
“아빠예 내 애리다. 잘 지내지예. 내 동생하고 엄마하고 잘 지낸다. 옴마 말 잘 듣고, 동생도 잘 보고 잇으낀께 아빠도 돈 마이 벌어 온나…,”
 
그리고는 더는 말이 없는 큰딸을 보고, 엄마는 더 해도 된다는 눈짓을 보내지만,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부끄럽게 달아오르더니  할 말이 없다는 듯, 두 팔로 방바닥을 밀어 뒤로 물러나 버린다.
 
엄마의 시선이 둘째 딸에게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아빠 내다 애란이, 응가는 부끄릅은갑다 인자 더 말 안한다케서 내가 한다. 거는 덥다고 옴마가 글카는데 마이 덥나? 여는 춥다. 그래서 지수는 자꾸 콧물을 질질 흘리서 드르브 죽것다. 옴마는 만날 내보고 따까주라 카는데 짜증난다. 따까주모 또 흘리고, 따까주모 또 흘리고 그란다. 무슨 가수나가 콧물을 저리 흘리삿는지 모리것다. 옴마 배는 인자 마이 나왔다. 으른들은 아들이라카는데, 아빠도 아들이 좋나? 내도 또 지수거튼 여동생이 나와서 자꾸 콧물 따까주야 되모 실타, 차라리 남동생이모 조컷다. 온제 오노? 빨랑 돈 마이 벌어서 온나.”
 
둘째 딸의 수다스러움에 엄마가 살짝 뒤 돌아앉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코흘리개 셋째 딸은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 흉을 보는지도 모르고, 엄마 무릎에 앉아 카세트녹음기 안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테이프만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다.
 
“옴마 내 다 했다.”
잠깐의 정적도 허락하지 못하는 둘째가 다음을 이어가라고 재촉한다.
“자 이제 지수 니 차례다. 아부지한테 하고잡은 말 해보그라.”
“아빠 음따.
눈에 보이지 않는 아빠에게 말을 하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셋째 딸이 맑은 눈으로 엄마를 본다.
“이 바보야! 여 말하믄 아빠가 듣는다안카나!”
동생의 엉뚱함에 둘째가 답답한 듯 호통을 친다.
 
이 모든 상황을 전해 듣는 아빠는 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고향이 더 그리워 타향살이가 더 고되면 어쩌나.
 
아빠? 아빠,

엄마는 녹음기에 대고 연신 아빠만 부르는 셋째의 모습이 우습지만, 가슴이 아프다.
“그람 우리 지수는 잘 하는 노래나 불러 드리까?”
“노래?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나라 오너라~”
 
셋째 딸의 어설픈 발음의 노래가 이어진다. 흥이 난 셋째 딸이 일어나 엉덩이까지 흔들어 대기 시작하지만, 엄마와 두 딸은 숨을 죽이고 녹음기 안 돌아가는 테이프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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