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주꾸미 대신 순댓국

수상한 남편 (단편소설)

by 바카롱

군대에 다녀온 아들은 최근 들어 유독 제 아빠를 챙겼다.

"아빠, 나 시간 되는데 나랑 같이 가요."

"결과만 듣고 오는 건데 뭐 하러." 남편은 극구 거절했다.

아침 운동을 가려는 나도 마지못해 한 번 더 물었다. 소용없었다.

"난, 그럼 운동 갈게."

별일이야 있겠나?

그러나 몇 십 년째 술담배를 달고 산 남편에게 충격적인 결과가 있을까, 걱정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은 지금까지 식구들의 권유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라며 가족들의 입을 막았다. 제대로 된 검사가 처음이라 모든 수치의 결과가 막연히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남편의 생애처음의 전신 건강검진,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다. 남편은 검사를 하던 당일 대장 내시경에 작은 용종 제거까지 기진맥진하여 들어왔다. 안쓰러우면서도 평소 건강에 무심한 삶의 태도가 반추되어 미움도 적지 않았다.

"진작 몸에 좀 신경을 쓰지." 괜한 뒷말임을 모르지 않지만 자꾸 타박이 나왔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젊어서부터 일을 핑계로 술과 담배에 젖어 살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수척해진 얼굴과 검게 변한 얼굴색에 간의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지, 식습관이 좋지 않아 다른 이상이 있지는 않을지 마음이 아주 개운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하던 중에도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핸드폰을 가까이 두고 움직였다.

"벌써 가시게요?"

이웃의 아는 채에 눈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화가 한 번 올 만도 한데? 싶은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남긴 식탁 위 흔적 외엔 아침과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소리에 내 입에서는 "뭐래?"가 튀어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받지 않았다. 조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외출차림을 했다. 헛걸음이 될까 봐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빠한테 연락 없었어?"

"ㅇㅇ"으로만 답이 왔다.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4층의 건강검진 코너의 모든 곳을 둘러봤지만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남편의 이름을 대며 행적을 물었다.

"아! 그분, 의사 선생님 상담 다 끝났는데요. 1층 수납처에 계시려나? "혼잣말을 덧붙이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됐어요, 끝난 지?" 이 십분 전 쯤이라는 말에 갑자기 신경이 삐죽 섰다. 이 남자가 무슨 일이래? 불길한 상상에 걸음을 재촉했다. 수납도 끝난 것을 확인하자 드라마처럼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 지 목덜미에 땀이 솟았다. 집으로 갔으려나? 택시를 탔을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거야. 간일까? 대장은 용종만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을까? 수십 년 펴온 담배가 원인입니다.라고 했으려나?



병원을 나서자 한낯의 볕이 얼굴 전면에 쏟아졌다. 걱정과 불안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양산을 꺼내 펴려는데 몇 미터 떨어진 건널목에 익숙한 뒤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아, 여기."놀라서 말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옆에 어느 여자와 두런두런 웃어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아닌가? 밖에서 본 남편은 친절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저어가며 웃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양산을 앞으로 기울여 얼굴을 가렸다.

바로 걸어가, 뭐 하는 거냐고? 전화는 왜 안 받냐고?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소리는 목 안에 갇힌 채 맴돌기만 했다. 약이 올랐다. 서둘러 병원을 오르내리는 동안 둘이 그렇게 히히덕, 그래 너 잘만났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너, 잘 걸렸다.' 입을 앙 다물었다.

약 여자와 동행하려 아들의 호의까지 거절하고 혼자 온 것이라면, 이참에 이혼도 불사하리란 결심이 바로 서는 순간이었다. 최근 남편의 퇴직 후 집에 긴 시간 머물며 더 많이 부딪히던 참이었다. 과거 결혼생활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직장 부하들이라고, 상사라고 자정이 다 되는 시간에 끌고 들어온 사람이 몇인가? 숱하게 차린 술상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았던 요즘이었다.

'너 잘 걸렸다!' 양산 밑으로 시야를 확보하고 뒤를 밟으려는데 신호가 바뀌어 그들이 발을 떼기 시작했다. 같은 신호에 가기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한쪽으로 비껴서 그들의 눈에 뜨지 않으려 움직였다. 다음 신호에 건너가 바짝 쫓아가리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여자에게 뭐라 말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차분히! 평소처럼! 무심한 듯이!

"어, 병원에서 뭐래?"

"어! 다 뭐, 괜찮다는데."

어쩐지 옆으로만 보인 남편의 얼굴에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여자와 웃으며 말을 주고 받는게지.

"간 수치도 문제없고, 대장만 매년 검사받는 게 좋을 거라고는 하는데......"

"경동맥검사도 좋고 뭐 다 정상이라 특별히 약 먹을 거 없다는데."남편이 말끝에 웃음을 흘리는 것 같았다.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소음과 경적에 잘 들리지 않을 때 그들은 횡단보도를 다 건너갔다.

신호가 바뀌자 정차했다 일제히 움직이는 버스들 탓에 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놓칠지도 모르고 버스에 올라 나를 알아볼까 양산을 더욱 내리며 신호가 빨리 바뀌라고 조바심을 냈다.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뛰다시피 큰길로 걸어 나아갔다. 손에 땀이 나서 핸드폰이 미끄덩 거렸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 쪽을 바라보니 남편과 여자 모두 눈에 뜨이지 않았다.

황급히 상가 쪽 그늘 밑으로 걸어 들어가며 계속 두리번거렸다.

손에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근데 당신 어디 가는 거야? 오늘 집에 있을 거라 하지 않았어?"

"으응?" 순간 내가 집이라고 말하지 않았었나? 아주 짧은 반추에 기억이 나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남편이 저를 보라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겨우 십여 미터를 두고 계속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집에 하루 종일 있겠다는 건 아니지. 그럼, 건강은 다 이상이 없고 약 먹을 것도 없다는 거지?"

나는 너무 놀라 버럭 화를 내며 말머리를 돌렸다.

"응. 근데 어딜 가는 거야? 이쪽에 볼일 있었어?"

나는 대꾸를 하면서도 여자는 어디에 있는지 남편의 주변을 훑어보았다.

"누가 좀 보자고 해서."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리고 궁금도 했다.

"근데 아깐 왜 전화를 그렇게 안 받았어? 전화받으며 누구랑 얘기하는것도 그렇고."

"아 아, 나한테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검진 비용이랑 차이가 많다고 물어보길래, 영선이 회사덕에 거의 무료로 한거라고 설명해주느라고. 부럽다고 하더라구. 딸이 좋은회사 다닌다고."

아! 침을 꼴깍 삼키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무생각없는 저 양반이 그럼 그렇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집에 밥은 좀 있나? 아니면, 사 먹고 들어가야 하나?"

"밥 하나 가득 있어. 아침에 해놓은 국이랑 고기도 있고."

"약속 아니면, 나랑 점심 같이 먹으면 좋은데. 여기 주변에 맛집하나 있거든. 내가 예전에 애들 데리고 한 번 오자고 한 적 있지, 왜! 주꾸미 불맛 좋은 식당이 이 주변이야."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자 전화를 끊고 버스에 오르는 남편을 보며 핸드폰을 닫았다. 걸어가는 시늉을 하며 버스가 멀어지도록 서있다가 시장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혼자서 순댓국집 문을 열었다.

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들어붙었다. 순대국집 벽에 걸린 거울속 내가 보였다. 화장은 땀에 씻겨 지워졌고 립스틱은 아예 바르지 않았던 것을 알았다.



keyword
이전 03화굿바이, 에어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