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는 별로

왜, 어째서인지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by 바카롱

40여 년을 친구로 살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 여겨왔다. 재수생 시절 눈에 띄는 그 친구의 외모에 끌려(상당히 이쁜 이목구비로 아직도 우리 엄마는 이 친구를 가장 이쁜 사람으로 칭한다) 치기 어린 편지를 건네면서부터 우리는 아주 오랜 친구가 되었었다.


눌러쓴 모자 밑으로 예쁜 -최진실보다 조금 더 이쁜?-이목구비를 가진 친구에게 한 장의 쪽지를 보냈다. 중고등 시절에도 하지 않던 짓이었는데 이 시기에 재수의 본업과는 다른 큰 고민덩어리가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기를 포함한 어떤 글도 쓸 수없었다. (마치 글쓰기 대가가 고뇌에 빠지 냥) 한 문장 속 개별의 단어들의 긴밀하고도 내밀한 관계가 나의 의도나 생각을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의 형용사를 선택하는 순간 그 단어만이 가진 고유한 속성의 바운더리 안에서 선택되는 다음의 단어들은 나의 의도를 넘어 그들끼리 내통하는 것 같아서 단어를 꾸욱 눌러쓰고는 내려다보다 끝나는 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고민을 했다고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은 아니다.

반면 내쪽지에 응수한 친구는 국문학과를 나와 전업작가로서 살고 있다.


그래서 보낸 쪽지에는

" 당신은 혹시 말에 차이지 않는 방법을 아십니까?"

낯 뜨겁지만! 이 날 이후 우리는 긴 세월을 친구로 살았다. 안다, 모른다 답이 없이 낮술을 들이키며 시작하여 386 시대의 주역으로 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냈다. 연애하고 결혼을 하며 둘 다 딸아이 둘을 키우며 살았다.


친구의 남편도 이 시기에 학원에 같이 다닌 남자다. 서강대를 한 학기 다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남는 2학기, 서울대를 목표로 시험준비를 하려 학원에 발걸음 한 이 남자는 친구를 아내로 맞는 중차대한 걸음을 한 것이다. 몇 살이 더 많은 그를 우리는 00형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80년대 분위기에는 그랬다. 선배라는 이름도 있었는데 그녀는 형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한다.(간혹 남편 아님 동거남이라 칭하기도 한다)


나는 친구의 여러 가지를 부러워했다. 그녀의 오빠나 동생, 그리고 남편까지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학벌 사대주의? 라 할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보이는 기본적인 세계가 그런 정도인 것이 제일 부러웠다. 나중에 친구의 큰 아이 석사 유학준비도 남편의 조언과 지도가 담당교수보다 득이 된다고 들었다. 내 부러움은 타당한 거라 생각되었다. 쉽게 공부를 포기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나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친척들 이야기를 들으면 더더욱 그랬다.


남편이 영국으로 MBA를 따러 온 가족이 동행했을 때 IMF가 터져 남편만 두고 온 친구는 글쓰기로 가족을 부양하는 어려움을 씩씩하게 해냈다.


나는 친구에게 부러움에 더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푸념이나(물론 뭐 그렇게 절망적인 환경은 아닐지라도) 가족을 험담하거나 원망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세상과 담을 쌓고 칩거하는 고학력의 남편을 두고도 흔히 하는 아줌마의 원성을 들은 적이 없다.


그냥 " 도 닦는다!"정도가 내가 마주한 그녀의 유일한 푸념이다. 그런 그녀에 비하여 나는 온도차가 하루에도 여러 번이다. 태생이 우울한 그녀에게 유일한 어둠의 기원은 아들과 딸을 차별한 어머니의 양육태도와 차가움이었다. 어머니의 제삿날이면 한잔 걸치고 귀가하는 길에 " 제삿날이야. 한잔 했다." 짤막한 문장에 살아생전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회한이 하나 가득 실려있었다. 그에 반해 나는 어머니의 전폭적인 희생과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산다. 그런 친구에게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그 이쁜 딸을!"이라 하시며 김장을 한 상자 보내주기도, 초록색 목도리를 떠서 주시기도 했다. 평소 친구는 내 엄마의 정치적인 신념이나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존경하고 "어머니가 정답이시다야!"를 외쳐주기도 했다.


그런 친구다. 그런데 작년 가을 나는 친구에게 달랑 하나의 메시지를 받고 어안이 벙벙했다.


통화는 별로


카톡이 거의 전부이긴 해도 일 년 두 번의 만남과 가끔의 통화로 40년을 이어 온 친구가 전화를 세 차례 받지 않더니 보낸 짧고 강한 메시지!


통화는 별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거나 말할 기분이 아니더라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그 사연과 함께 해명이 있을 거라 믿은 나는 하루 이틀 기다려보았지만 친구의 답이 없었다.


몇 달 뒤, 올 초에 시위현장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미세먼지가 심각한 날이라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만나 그 간의 서운함이 오해이길 빌며 길을 나섰다. 시위 행렬에 머물다가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아 섰다. 시위대의 소리가 작아지는 시점에 얼마 전 카톡에서 본 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통화는 별로를 어떻게 풀어갈까 망설이던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작은애 남자 친구, 키가 엄청 크더라"

"어떻게 알아?"

" 카톡 프사에 있던데" 이전에 큰 아이 남자 친구가 크다고 했었는데? 둘 다 그렇게 키가 큰건가? 내 기억이 잘 못된건가?싶어 말을 꺼냈다.


딸아이의 전화번호가 어떻게 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 친구에게 기억을 소환시켜 주었다.

"그때 왜, 너나 나나 급할 때 연락 안 되면 안 된다고 딸 애들 전화번호 하나씩 주고 받았잖아"

몇 년 전 친구와 오랫동안 연락이 안 돼서 마음을 졸이다가 제안한 것은 나였던 거 같다. 연락이 안 되었던 이유는 둘 다 까먹고 말았다.


"그런 걸 왜 봐?"

" 어?" 잠깐 당황했다. 그렇지 정말 크지!로 응수할 거라 기대한 내게 친구가 정색을 했다.

" 그런 걸 보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가더라"

" 프사는 보라고 있는 건데"

단호한 친구의 말에 밥을 먹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주절주절 말하지 못한다. 매일 수시로 사진을 전송하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일상을 전하는 내게 친구는 여전히 별 말이 없다. 원체 말이 적긴 해도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거의 말이 없다. 딸과도 일 년에 몇 차례 정도 카톡을 주고받는 친구에 비해 나와 내 딸들은 하루에 많게는 200개의 카톡이 쌓인다고 남편이 말한다.


하루에도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나를 이미 비웃었던 친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젠 너무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몇 달 전 표면적으로는 친구 간의 절교를 그린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며 아픈 기억이 떠올라 둘레길을 걷는 사진을 전송했다.

기분이 좋지 않다며 별반 즐겁지 않은 답변이 오기에 그럴수록 나가서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떠냐는 나의 권유에 "환장하겠네!"라는 답이 왔다. 핸드폰을 쥐고 잠시 서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가량 카톡을 열지 못했다. 무서웠다. 내가 잘못 봤나? 싶기도 하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돈가스 먹지 않을래?"

"나 돈가스 끊었다." 정치적 신념 때문에 돈가스도 안 먹겠다는 친구가 한 말이다. 싫어지면 끊을 수 있는 것이 음식뿐이지는 않을 테지만, 그녀의 조용하고 차가운 성품에 내 달뜸이 영 싫었던 걸까?



무엇이었을까?


여전히 미궁인 채 여러 날들이 지나간다. 친구에게 주절거리지 못한 말들을 여기에 쏟아낸다.


왜, 어째서인지는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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