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림없이 이뻐지실 거예요" 광대가 튀어나오도록 크게 띄운 미소와 치켜 세운 동그란 눈으로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이다.
오늘 처음 보는 그녀는 입장부터 눈길을 끈다.
미세먼지하나 없이 맑은 날 오전, 미용실에 앉아 물에 젖어 납작해진 정수리를 마주하고 질끈 눈을 감는다. 차분한 미용사의 손길에 젖은 머리카락이 사가사각 조금씩 잘려나간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죠? " 미용사의 말에 눈을 떠 몰골을 마주한다. 약을 두르고 랩으로 머리를 감싼 후 머리 위로 기계를 끌어와 열을 가한다. 윙윙 십자모양의 기계가 머리 위를 돌기 시작할 때 그녀는 활기 있게 들어선다.
때가 되었다는 인사들을 주고받으며 옆자리에 앉는 그녀가 젤 먼저 한 일은, 들고 온 책을 뒤편 소파에 던져놓는 일이다. 책이 툭 떨어지며 책사이에 끼워져 있던 붉은색 색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와 도르르 구른다.
붉은색 색연필, 실을 당겨 껍질을 말아 당기는 색연필을 가진 여자라? 들고 다니기까지.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다.
미용사가 얼른 색연필을 주워 책 위에 얹어놓으며 편한 자리에 앉으라 권한다.
"오렌지빛이 좀 돌면 좋을 거 같아"
"조금 밝게 해 볼까?
이미 친근한 사이인지 서로가 반말이다.
"이 색도 다들 예쁘다고 하는데 이번에 좀 밝은 오렌지 빛으로 가고 싶네. 길이도 좀 봐줘. 길어지니까 자꾸 쳐져서"
바로 옆거울은 벽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들어설 때의 그녀를 복기하여 머리길이를 떠올린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길이, 가운데 가르마가 자연스러운 단발이다. 문제는 정수리가 훤하다는 것이다. 머리숱이 큰 걱정이겠다 싶다.
머리를 쓸어 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옆얼굴로 떨어져 흐르는 머리카락의 모양이 그녀의 얼굴과 조화롭게 보이며 전체적으로 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바로 보인 문제는 안부 인사에 답한 늘어나는 뱃살보다 머리숱이었다.
"그냥 좀 참으려다가 낼 도곡동 사는 친구 만나려니까 신경이 쓰이네"
아하!라는 짧은 말로 수긍을 보여준 미용사가 길이를 가늠하는지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움직여본다.
졸렵다. 미용실에선 늘 잠이 온다. 그녀가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잠을 잤던 것 같다.
장비에서 나는 마감소리에 눈을 뜨니 여전히 염색약을 바르는 중이다. 1층 길가에 위치한 미용실 옆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한다. 행인들의 어깨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빛이 아름답다. 가로수로 심어진 사철나무잎들이 저마다 빛이 나고 자잘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나른한 정신에도 절로 미소가 만들어진다.
그늘진 실내의 정적을 깬 것은 다시 그녀다.
" 도곡동이 뭐라고,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네"
분명 잠을 잤는데 조금 전의 말과 이어지는 말이라 잠을 의심해 보지만 시술이 일 이분에 되는 게 아니니 의아하다. 그 사이에 그녀의 도곡동 친구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려졌을지 가늠해 본다.
그녀가 소파로 옮겨가 책을 집어 들고 붉은 색연필로 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는다. 내 앞 마주한 거울의 비친 그녀를 슬쩍 쳐다본다. 웅얼거리기도 감탄의 고갯짓을 하기도 하며 책을 읽는다. 다리를 꼰 채로 소파에 걸쳐 앉은 그녀는 한껏 우아함을 장착한다.
이제 미용사가 내 머리를 만지기 시작한다.
"좀 가늘게 말아볼게요."
가는 머리카락 쥐고 얇은 종이짝을 맛대어 돌돌돌 마는 동안 미용사의 손목에 시계처럼 찬 종이 담긴 박스가 눈에 띈다. 닭뼈 같은 플라스틱에 노란 고무줄, 보자기를 뒤 짚어 쓰는 일까지 변함없는 가운데 그것만은 새로워진 것 같다, 옆에서 종이쪼가리나 고무줄을 집어주는 보조가 없을 때 유용하겠으나 기기자체는 여전히 단순하고 촌스럽다.
보자기를 두르고 다시 창밖을 본다. 의자를 돌려 몸을 밖으로 향하니 소파에 앉은 그녀가 창밖은 관심 없이 여전히 책을 본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즐겁다. 이 모양, 저 모양 다양한 생김새와 옷차림에 지루함을 느낄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라디오 뉴스를 듣다 보면 모든 범죄인들은 하나같이 외자에 이모씨, 정모씨, 박모씨 등 모든 사람의 이름이 '모'라는 것에 궁금증을 가진 적이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이모군, 김모씨로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름을 붙여본다.
정오가 되어간다.
햇빛이 찬란하다
아름답다.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사는 동창을 떠올린다. 크고 늘씬하며 우아하다. 30년을 건너뛰고 만난 그녀가 큰아이 혼사에 5만 원을 축의금으로 보낸 것이 떠오른다. 30년 만의 동창모임 후 바로 이어진 딸의 결혼식에 몰라라 할 수 없어 나와 친한 동기 편에 전한 한장의 축의금은 도곡동 타워팰리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언니, 이리로 오세요." 미용사가 독서와 내 상상을 중단시킨다.
머리를 감고 앉아 색이 좋다며 흡족한 말을 한다. 보자기를 둘러쓴 큰 머리를 돌려 그녀의 머리색을 본다.
"언니, 마르면 더 밝아질 거야."
"이쁘네"
그녀가 흡족해한다.
3센티쯤 짧아진 머리가 드라이기에 이리저리 휘날리다가 얼굴 위로 떨어진다.
자리에 일어선 그녀가 미소를 장착한다.
손가락을 넣어 정수리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턱을 쳐들며 자신을 감상한다.
계산을 마치고 책과 색연필을 집어 들고 미용실을 나서며 느닷없이 한마디 한다.
"틀림없이 이뻐지실 거예요."
그녀가 길로 발을 내디뎠을 때에야 내게 한 말인 것을 알았다.
내 머리 위 보자기를 두드리던 미용사가 내 당황함에 맞장구치려는 듯 콧등을 찡그린다.
처음 본 타인에게 전하는 말도 틀림없이라는 말도 참 평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