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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당아욱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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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Feb 07. 2024

어머니가 답이다

삶의 잣대

세상 모든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 같지는 않다. 주변을 보고 느끼는 것만이 다가 아니고, 엄마로서의 나를 돌아봐도 나의 어머니와는 매우 다름을 느낀다. 감정에 휘말려 이성을 잃는 것은 예사고, 아이처럼 맞서는 것이 대부분이라 딸들에게 들었던 가장 서운한 말은 '엄마는 할머니와 다르다'는 지적이었다. 


어머니와의 몇 가지 일화는 어머니의 인품과 지혜를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야 만다.


오래전의 일이다. 직장에 다니며 쌍둥이 둘을 키우려니 어머니댁 근처로 이사를 해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몇 달을 지나지 않아 아예 어머니의 댁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자식들이 나가 생긴 작은 방 2개를 쓰며 더부살이를 하다가 아래층 세가 나간 자리로 옮겨 두 해를 더 살며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도 손녀들을 돌보는 육아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어머니께 도움을 받아 사무실을 개설하고 작은 개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개설한 며칠 뒤, 멀리서 사는 동생 내외가 어머니댁으로 놀러 오게 되었다. 집안으로 들어서며 동생이 나를 보자 젤 먼저 한 인사는 남편의 사무실 개업에 관해서였다.

"누나, 돈 좀 있었나 보네. 매형 사무실 냈다며?" 돈의 출처에 대해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어머니께서 내 손을 잡으며 " 누나가 얼마나 알뜰하니? 공무원 신용도 좋고." 어! 하고 입을 다물며 어머니의 찡긋하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동생은 그 답에 만족했는지 더 묻지 않았고 다른 가족들의 인사에 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조력을 생색내지도 않으시고 내 체면도 세워주고 계셨다.



다음의 일이다. 동생의 신혼생활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차를 구입하고 일부 금액을 매달 내주고 계신 어머니께 볼멘소리를 했었다.

" 엄마, 엄마 살림도 힘든데 뭐 하러 걔 차 값을 엄마가 대 주셔요? 대기업 수입이 얼마나 좋은데."

" 내 아들 내가 잘 좀 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넌 애들 봐주는 것으로 치면 그 값 못지않아. 사실이 안 그러냐?" 


다시는 시샘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번은 동생이 연수장소와 근거리인 어머니댁에서 일주일을 지내게 된 첫날이었다. 아내와 동행한 동생은 고등학교 친구들을 불러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가보니 밤늦게 파한 술상이 그대로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쌍둥이 하나씩을 등에 업고 아침상을 차리러 방을 나선 엄마와 내가 동시에 보고 맞닥뜨린 장면이었다.

"아니, 올케는 자기 신랑 친구들이 마셨으면 좀 치우고 자던지 아님 일어나 같이 치워야 하는 거 아녜요?"

"아고~ 하기 싫으면 들어가. 나 혼자 해도 되니까. 시누 노릇하지 말고"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다음부턴 절대 올케의 행동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 물론 올케가 경우가 없게 하지도 않는다. 


결혼 십 년쯤 지난 올케가 왜 나와 제 남편이 어머니를 좋아하는지 알겠다고 말했었다.


20대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가 연인과의 이별로 괴로워해서 홍대 가는 길 프린스에서 낮술을 마셨다. 술이 과하게 되어 자리를 빨리 마무리하려고 친구의 담배를 내 가방 속에 넣어 감췄다. 친구를 어르고 달래 귀가를 시키느라 가방 속 담배를 잊고 있었다. 집 가까이 이르러 생각이 난 담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몰래 어디다 버려도 되련만 그 장면이라도 누가 볼까 노심초사 집까지 가져오고야 말았다. 다음 날 집을 나가 어디 낯선 화장실에다가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루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어제 청소를 하시는 길에 내 방의 그 물건이 발각된 것일까? 바로 걱정이 밀려왔다. 식구들이 모두 나간 뒤에 어머니께서 나를 안방으로 부르셨다.

올 것이 왔구나, 사정을 다 이야기해야지. 그런데 친구에 대해서는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맘을 졸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앉자마자 어머니께서 내 손을 두 손으로 잡으시며 딱 한 마디 하셨다.

"난 니가 안 했으면 좋겠어." 그러시더니 눈물을 훔치셨다.

"네.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했었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속상해하시는 어머니를 안아드린 것은 분명하다. 제 것이 아니에요라고 변명하지 못한 것은 나도 친구 따라 손을 대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다음부터 나는 담배를 손에 대지 않는다.


담배의 임자였던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었으리라! 그 친구도 어머니를 좋아한다. 우리 집에 오면 늘 밥상을 정성스레 차려주시니 여러 친구들이 어머니를 기억한다. 대학 동기들도 시원하게 한상 가득 차린 냉면을 기억한다. 젤 친한 친구를 위해 김치 한 통을 부친 적도 있고, 목도리를 짜서 준 적도 있으니 짐작할만한 일이다.


수년 전 가족들과 이탈리아를 3주 돌고 귀국하여 공항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으나 받지 않으셨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다시 전화를 드리니 숨이 조금 가쁘신 어머니께서 버스에서 내린 길이라며 우리 집을 다녀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더운데 끌개를 끌고요? 왜요?" 

"외국에서 우리 반찬 못 먹었을 텐데. 힘들어서 바로 밥 해먹기도 어려울 테고. 몇 가지 가져다 놓고 밥도 안쳐놨어. 맛있게 먹어라."

그날 우리 식구 넷은 냉면 대접에 흰쌀밥 하나 가득 담고 묵은지 돼지고기찜과 고추 멸치조림 등을 얹어 한식의 한을 풀었다. 


"성적표는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줘, 나야 기다리면 되지" 하신 어머니의 일화는 이미 글로 썼다. 이 일화로 아이성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곤 했다. 엄마의 믿음과 기다림이야말로 제일 큰 보험이 될 거라고!

내 딸들도 어머니께 조언을 구할 때가 많다. 엄마보다 할머니를 찾으니 조금 면구스러울 때가 있지만 어쩌랴!


머리에 돈을 들이지 않는 내게 파마를 여러 차례 권하시기에 왕창 볶아버릴 심산?으로 호일 퍼머를 한 적이 있다. 완전히 펑키한 다소 파격적인 스타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놀라시며 잠깐 실피시더니,

"너무 심하지는 않아?" 그러시더니 바로  "근데 어울린다. 어울려"웃으며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일상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삶으로 들어와 있다.  


"얘, 화분은 아주 많이 어울려 모아 놓거나 아니면 깨끗한 벽에 하나만 놓아야 이쁘다. 어중 띄게 늘어놓으면 지저분하고 안 이쁘더라구!" 어머니의 미적인 감각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내게 어울리는 옷도 어머니께 여쭙기가 태반이다.


내가 무언가 결정해야 할 고민이 있을 때, 글 쓰는 친구는 어머니께 여쭤보라 말한다. 

"야, 어머니께 여쭤봐. 어머니가 답이다. 야"


어머니는 내 삶의 잣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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