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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당아욱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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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카롱 Feb 06. 2024

제라늄

어머니를 기억하는 꽃

어머니, 최근 제가 누군가에게 "어머니께서~"라고 하니 특별하다고 하더라구요. 엄마대신 어머니라고 쓰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되는데 이상하게 엄마보다 어머니가 입에 붙는 소리가 되었어요. 왜그런지 모르겠어요. 언젠가부터 어머니가 대단하신 분이란 걸 느껴서 일까요?


오늘 아침에도 문안 전화를 드렸지요. 눈이 내린 엊저녁부터 다시 추위가 찾아와 입춘이 지났음에도 어머니의 아침 산보는 중단되었으니 달리 할 일이 없다고 하셨어요. 눈에 덮인 먼산을 보다 어머니께서 맘먹고 시작하신 아침산보가 중단돼서 뭘 하시나 전화로 여쭈었어요. 어젯밤 눈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요.


하나도 급할 것도 어제와 다를 것도 없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저는 엄마를 부르는 아이같이 변하는 저를 느껴요. 학교 파하고 돌아와 조잘조잘 떠드는 여자아이 같은 심정이 되어요. 장은 뭘 봤으며 냉장고에 무엇을 들여놓았고, 냉동실 사정들이 뻔해도 다시 하는 그 하찮은 얘기들이야말로 어머니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생각이 들어요. 오늘은 저도 아침 생각이 없어 최근에 아침이 먹기 싫어져 하루 두 끼만 먹으려 하신다는 말씀에 저도 그렇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어요. 마치 "엄마, 나도 나도!"하는 심정이거든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에 덧붙인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제라늄이었어요. 이상하게도 외워지지 않는 이름이 제라늄이에요. 희한하죠? 어머니의 최애 사랑이며 베란다에 가장 많은 꽃인데도 그 이름은 당최 외워지지 않아 제 머리를 걱정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쟈스민하고 헛갈린다고 투덜댔죠. 어머니는 제라늄의 첫 글자 '제'하나만 외워보거라! 라든가 '누구나 외워지지 않는 게 있지',라는 말로 저의 심통스런 언사를 누그러트려주셨어요. 저는 거기다가 원소기호를 떠올려보겠다고 대답했지요. 늄, 듐, 이런 글자가 가지는 느낌 때문이에요. 어머니 집엔 그 어렵다는 제라늄이 한 여름 만발하는데 올여름엔 처지가 달라질 수도 있겠어요. 지난 초겨울 화분이 무거워 집안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여든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의 연세엔 어쩔 수 없는 결단이셨어요. 몇몇 제라늄이 시원치 않은 것을 두고 '얘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말씀하셨어요. 매년 봄가을로 화분을 방까지 옮기시는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두고 감탄하기만 하고 도와드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참. 그 많고 큰 화분들을 말예요.

"엄마는 힘이 장사네! 아이고, 이걸 어찌 혼자 다 옮겼어요?" 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만 했어요.


봄을 맞이하고 겨울을 대비하는 어머니 집 베란다에 가장 많은 것은 제라늄이예요.

"이제는 힘들고 귀찮기도 하고, 정리도 해나가야지."

'정리'라는 말이 가슴에 콕 들어와 지금도 베란다를 향한 어머니 눈이 떠올라 울컥해요.


어머니가 모두 나의 어머니 같지 않다는 것을 한 해 두 해 갈수록 더 느껴요. 저마다 타고난 기질이나 인품이 어머니라는 이름을 무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 알게 되었어요. 저는 어머니께 투정을 하고 어머니는 지혜로 좋은 말씀을 주시지요. 거기엔 대단한 사람의 멋진 말이 아니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지혜로운 생각이 담겼어요. 어머니는 근엄하시지도 위엄을 가진 것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나 지혜로우실까 가끔 고개를 갸웃하기도 해요. 저만 아니라 사촌들도 모두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니 어머닌 저의 자랑이고 든든한 배후예요.


여느 자매들처럼 조잘거리고 투덜거리기도 하며 말하는 사이 화가 누그러지기도, 걱정이 사라지기도 해요. 시시한 이야기를 되풀이해도 어머니와 통화를 마친 후엔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보며 하루를 기운차게 시작하게 돼요. 저녁에 드리는 전화는 무탈한 하루를 정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게 하니 어머니는 저의 테라피같은 존재신 것 같아요.

이제 제라늄을 두고 안 외워진다는 투덜거림은 어머니를 추억하는 이야기가 될테고 제라늄은 또다른 기억의매개체가 될 거예요. 이제 해가 잘드는 남의 집 창가 빨간 제라늄을 볼 때마다, 이국땅 목조주택 창가에 만발한 제라늄을 볼 때마다 생생했던 오늘의 전화 속 어머니를 떠올리겠지요.

"누구나 안 외워지는 게 있지 왜!"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사랑하겠어요. 저는 어머니의 '우리 이쁜 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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