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일

망각의 순서

by 시절화

시간을 지우고 싶었다.


지워내고 싶은 마음이 지우고 싶은 기억보다

앞질러 가던 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가장 가까운 어제부터 차근차근 지워야 할까,

아니면 이미 희미해진

먼 과거의 끝자락부터 지워야 할까.

어떤 시작점이 나를 덜 괴롭게 할까.


뭉텅이로 한꺼번에 도려내어 한순간에

홀가분해져야 할까,

아니면 하나하나 공들여 날려 보내며

이별의 예의를 갖춰야 할까.


도대체 지우면서도 이게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지워내면 비어버릴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혹은 지워낸 조각들이 먼지가 되어

다시 내 숨으로 돌아오지는 않을지.


지우고 싶다는 간절함과

지워질까 봐 겁이 나는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우선은, 지우개를 든 채

멈춰버린 시간 위에 멍하니 서 있다.


지울 수 있을 지 아닐 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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