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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an 11. 2023

미니멀 라이프라 그러지 않았어?

 잔고가 간당간당할 때 유난히 더 그런다.

 가전이 하나씩 고장 나고 스킨, 샴푸, 세제, 화장지처럼 구매를 미룰 수 없는 생필품들이 한꺼번에 떨어지면서 사야 할 것이 몰리는 시기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히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무언가 못 사서 안달이 난 사람마냥 쇼핑몰을 헤매고 다녔다. 잔고만 일관성 있었다.

이미지출처 pixabay


 자꾸만 비슷한 꿈을 꿨다.

 몰랐는데 수강신청이 되어있단다. 한 번도 수업을 듣지 않았으니 수강취소를 하려고 했는데 기간이 지나서 취소가 안된단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이 시험이란다.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아무것도 모르겠을 시험지를 받아 들고 막막해한다.

 수업을 들으러 가다 시간을 잘못 알았다는 것을 깨닫고 미친 듯이 뛰어 도착했는데 수업이 막 끝난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집 가까이 와서야 아뿔싸 수업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깨닫는다.

 시험을 보러 가는데 버스를 잘못 탔고 분명 계속 다니던 길인데 계속 길을 헤매고만 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이고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이따위 꿈을 꾸고 있는가. 편하게 살자를 주문 외듯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왜 꿈속의 어리바리한 나는 매 순간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세상이 이제 끝나버린 것만 같은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냐는 말이다.


 이 모든 악몽의 원흉은 회사라는 것을 알면서 출근을 하려니 환장할 노릇인 거다.


 영혼을 갉아 먹히는 대가로 돈을 버는 대신 퇴사를 하고 최소한의 소비를 하며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를 만끽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책을 다시 한번 집어 든다. 분명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이번에는 후루룩 넘겨 보다 내려놓는다. 수년간 학원을 다니고 결국 입시를 치러야 할 아이가 없는 분에게만 가능한 미니멀 라이프라며 괜히 시비다.

 그러더니 택배가 자주 오기 시작했다.

 둘 데도 없고 특히나 분리수거가 일주일 두 번이라 매우 자제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시작은 장을 자주 보는 것이었다. 방학을 핑계로 냉장고를 열심히 채웠다.

 5kg 용량의 쌀통을 사용하며 10kg의 쌀을 사다 먹기에 바닥이 보이고 나서야 주문했는데 이번에는 크게 세일을 한다는 핑계로 쌀까지 미리 샀다. 심지어 1+1이라는 고구마를 산다. 고구마 두상자라니.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그다음은 생필품이었다. 아직 재고가 남아있는데 나는 여섯 개 들이 치약을 사들였다.


 그러더니만 로봇청소기까지 들이고 말았다.

 사용하던 물걸레청소기의 손잡이가 부러진 지는 사실 몇 달 됐다. 안 그래도 소음이 심해서 낮에만 쓸 수 있는 전동청소기는 좀 있으면 10년이라 고장 나면 그때 버리자는 생각으로 이 집에 들고 왔다. 그런데 손잡이가 부러졌는데도 작동은 잘만 됐다.


 괜히 따로 구부려 손잡이를 만드는 게 아니었다. 부러진 아래 부분을 붙들고 청소기를 밀고 나면 손에 살짝 쥐가 났다. 왜 이리 고장이 안 나냐며 미련하게 쓰고 있었다, 고장 나면 그냥 버리고 집에 있는 막대걸레를 쓰려했다.

 그런데 누워있다 말고 불현듯 갑자기 청소기를 새로 사야겠다 다.


 걸레질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힘이 많이 들어간다며 이유를 붙인다. 그러더니만 갑자기 로봇 물걸레 청소기를 뒤지기 시작한다. 혼자만 출근하는 게 세상 억울한 사람처럼 나는 앞뒤로 밀 기운이 없으니 내가 출근한 사이 네가 물걸레질을 모두 해놓아라 하고 싶었다.


 그렇게 물걸레 청소기를 넣어놓았던 자리가 비었다.

 빈 공간이 생기면 뭔가 흐뭇하고 개운해서 휑해진 곳을 보며 기분 좋아하던 미니멀 라이프 근처에 있다는 사람은 어디 가고, 불안과 초조함을 쇼핑으로 해결하는 호더로 변신한 그 사람은 자리가 생기자마자 당장 키친타월을 떠올린다.

 

 20평을 줄여 작은 집에 이사했지만 의외로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물론 가지고 오지 못하고 많이 비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용하던 소비재를 집이 작다고 더 이상 쓰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대용량제품 대신 작은 것을 주문하는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나 키친타월은 도리가 없었다.

 몇 년간 한 가지만 고집해서 사용하던 제품이었다. 놀러 간 집에서 한 번에 쫘악 물기가 흡수되는 너무나 짱짱한 키친타월을 발견한 나는 대체 어디 거냐고 물어보기까지 했고 그때부터 그것만 썼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 중에도 몇이나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문제는 안 그래도 다른 제품보다 크고 높은 것이 12개가 한 세트라는 것. 이전 집에서 사용하다 남은 세 개를 다 쓰고는 둘 곳이 없어서 다시 주문하지 못했다. 이걸 사봤다 마음에 안 들어 다음에는 저걸 사봤다가 이러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호더의 시기에 자리가 생긴 거다.


  기존 것이 한 개 남아있기까지 했는데 몹시 방정치 못하게 주문 버튼을 누른다. 지금까지 작은 집에서 받아본 택배 상자 중 가장 것이 도착한다. 축구하러 나가다 거대한 택배상자가 도착한 것을 발견한 아이는 진심으로 당황하며 이것의 정체가 뭐냐 묻는다.

 촐싹대며 드디어 왔다고 좋아하며 비어있던 공간에 하나하나 쌓는데 피식 웃음이 난다. 잘하면 1년 동안 쓸 것 같다. 이름을 경계성 호더로 바꿔야 할라나. 


 던 것이 있는데도 당장 뜯어 써본다. 아. 바로 이거다. 손에 착 붙고 한번 손길에 물기는 싹 사라진다.

살림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해 주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이템을 발견해 사용하는 것. 별 거 아닌데 매일 똑같이 반되는 집안일을 즐겁게 해 주며 아주 소소한 기쁨을 준다.


 작은 집에 살아도 결국 내 맘에 드는 것들은 한 가지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을 수 있다니. 나는 참 운도 좋지. 앞에 서서 들여다본다. 곳간에 곡식을 잔뜩 쌓아둔 사람처럼 괜히 흐뭇하고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까 그 큰 상자 속 물건을 어디다 다 넣었냐는 아이에게 벽인 척 닫아 둔 문을 열어 보여준다.

"엄마, 미니멀 라이프라 그러지 않았어?"


 분명 호더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미니멀 라이프 근처에 있다고 우기는 사람은 말한다.

"응, 딱 맘에 드는 키친타월이 가득 차 있어서 마음이 너무 하고 좋아. 그럼 됐지 뭐."


 당분간은 꿈에서 헤매지 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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