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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n 14. 2023

큰 상자가 오는 날, 물건을 비웁니다

 10평대 작은 집의 공간은 지금 당장 쓰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

 쓸 것만 같은 물건, 썼던 물건,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련한 물건을 위한 자리는 이 집엔 없다.

 

 20 평을 줄인 이사를 앞두었을 때처럼 거 물건을 비울 일은 없다.

 더 이상 비울 수 있을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시 쓰임이 다하고 필요가 사라지며 하나씩 하나씩 물건을 비워낸다.


 중고거래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드림'에도 상당한 에너지가 들기에 하지 않는다. 이사를 앞두고 하릴없이 했던 기간도 힘들었다.

 물건을 비우며 애용했던 방법은 물품 기부. 적어도 라면 상자 정도의 크기 한 상자를 채워야 기부 신청이 가능하다.


 한 개씩 물건을 비우다 보니 분명 누군가 잘 쓸 수 있을 것을 알면서도 따로 모아놓을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손쉽게 버리는 쪽을 택한다. 

 물건을 워낙 깨끗이 쓰고 옷도 깨끗하게 입는 지라 마음 한편이 찜찜할 정도의 좋은 상태의 물건은 나도 모르게 망설이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


 몇 번 반복되면 이 작은 집에 분명 내가 쓰지 않을 것이 확실한 물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큰 상자가 오는 날, 날을 잡고 물건을 비워낸다.


 분리수거 요일이 딱 정해져 있는 지금의 아파트에서는 온라인 주문을 할 때도 분리수거일을 계산한다. 대부분은 마트 배송라 종이봉투에 담겨 오고, 둘 데가 없으니 커다란 상자에 담겨 올 물건 구입은 몹시 신중히 한다.


하지만 간혹 큰 상자가 오는 날이 있다.

몇 년째 이용하는 새벽배송 사이트라 주문량에 따라 상자의 크기를 예측할 수 있다.  

 큰 상자가 배송될 날에 딱 맞춰 물품 기부 신청을 한다.

 버리려는 마음이 들었으나 버리지 못했던 물건들도 이제 자리를 비워줄 때가 됐다. 


 한 뮤지션의 음악이 오롯이 담긴 시디 들은 비우지 못하지만 이곡 저곡 집어넣은 컴필레이션 시디는 비워도 되겠다고 결심한 지 한참인데 이제야 꺼낸다.


 작년 여름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그리고 날이 더워진 지 한참인데 지금까지도 입지 않아 옷장 제일 왼쪽에 그대로 걸려있던 옷들. 지난가을과 겨울에도 왼쪽 구석을 벗어나지 못한 옷들은 앞으로도 입지 않을 옷들이다.    

 

 내가 골라 산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았지만 쓰지 않던 물건들까지 차곡차곡 넣으니 큰 상자는 금방 찬다.

 

 버릴 물건을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 인증하며 버리는 개운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상자에 넣을 때는 최대한 빨리, 가급적 생각하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인다. 

 한번 비우려고 생각했던 것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확신 하에 큰 상자를 채우는 데 드는 시간은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기부 신청을 하고 실제 수거일까지 시간차가 있기 때문에 미리 신청부터 한다. 이때 기증할 물품의 개수를 적어 내는데 버리려는 생각을 몇 차례 했던 터라 대부분은 개수가 맞는다. 혹시 부족할 때는 매의 눈으로 버릴 물건들을 추려 낸다. 

 신기한 건 그렇게 비워내도 늘 새롭게 비울 물건들이 나온다는 것. 이번엔 의류 10벌을 포함해 딱 맞는 숫자를 비웠다.

 꽉 채운 상자를 현관 앞에 두고 물건이 나간 공간들을 뜯어본다.

 한결 여유 있다.


 시디장 빈 곳에는 어울리지 않게 부엌 붙박이장에 있던 게임 시디들을 넣는다. 상의를 걸어놓은 옷장은 훨씬 낙낙해지고 옷들은 숨을 쉬며 골라 입기는 더욱 좋다.


 큰 상자가 오는 날, 물건을 비워낸다.

 개운함과 공간을 함께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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