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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Nov 06. 2023

묵은쌀로 햅쌀 같은 밥 짓기

나에게도 상냥한 쿠쿠가 생겼다

 작은 집에 이사 오기 전부터 몹시도 잘 사용하고 있던 압력솥.

 고압으로 갓 지은 밥맛 덕에 몇 가지 반찬 없이 단출하지만 맛있는 집밥을 누렸다. 늘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전기밥솥과 달리 필요할 때만 꺼내 쓰면 되니 작은 부엌에서 더욱 요긴했다. 10년 가까이 사용해도 늘 반짝반짝 빛나는 자태를 유지했으며 밥이 눌어붙어도 누룽지를 선물해 주어 기뻤다. 그뿐인가. 압력솥을 사용하면서부터 남은 밥을 얼렸다 녹여 먹어도 거의 새 밥과 같아 더 이상 햇반을 살 필요가 없었다. 여러모로 기특하고 장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상태가 이상하다.

분명 압력솥인데 그냥 두꺼운 냄비의 역할만 한다. 가열하면 압력이 차며 올라와야 할 빨간 레버가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뚜껑 사방으로 김이 줄줄 새면서 바닥은 타고 윤기라고는 없는 밥알 하나하나가 제각각 돌아다녔다. 산에서 냄비로 지은 것만 같은 설익은 밥은 새로 막 지은 밥맛 하나 믿고 집밥을 차리는 내게 참기 힘들었다.


 일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밥솥 패킹이 낡아 김이 샌다 했었고 새 패킹으로 교체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맛있는 밥을 지어냈다. 이번에도 그것이 문제리라. 오래된 제품이라 재고가 없어 무려 한 달을 기다렸다. 두꺼운 스테인리스 덕에 밥이 타도 누룽지로 먹으면 된다며 참았지만 한 달 내 맛없는 밥과 누룽지를 견디기 지칠 무렵 패킹이 도착했다.


 패킹을 교체하고 기대를 잔뜩 하고 밥을 지었으나 역시나 같은 증상.

또다시 검색을 해보니 이번엔 압력솥뚜껑 문제인 것 같다. 뚜껑을 택배로 보내고 받아야 하며 수리비도 상당하다. 10년 전에 샀던 밥솥 가격과 딱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수리는 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압력솥을 사려고 알아보는데 "모두가 밥을 지을 수 있는 전기밥솥을 구매하자"라는 의견이 나온다. 생각해 보니 압력솥으로 제대로 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다른 이가 밥을 하면 불조절에 실패해 타거나 제대로 닫지 않아 압력이 새거나 하기에 늘 내가 지었다. 전기밥솥을 사면 심지어 아이도 스스로 밥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예약취사가 가능한 점에 귀가 팔랑인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도 상냥한 쿠쿠가 생겼다.

그렇다. 예뻐서 샀다.

  작은 부엌에는 6인용 이상의 전기밥솥을 둘 곳은 없다. 3인용과 6인용이 얼마나 차이 나냐 하겠으나 올라갈 자리가 있고 없고가 결정된다.

 3인용 밥솥은 쉬지 않고 일하는 전기 주전자를 밀어내고 커피머신 옆자리를 차지했다.

 더 작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크다. 그러나 내솥이 반전. 식당에서 사용하는 뚝배기만 한 내솥이 들어있다. 밥솥 몸통을 줄이는 건 한계가 있나 보다.

 초고압으로 밥을 지어 밥맛이 좋다는 모델을 구입하고서는 테스트를 해 보겠다며 일부러 흰 쌀만 넣어 밥을 지었는데 엥? 밥맛이 영 시원치 않다.

 아. 쌀 자체가 오래됐었구나. 보통 흑미와 귀리를 섞어지어먹어 몰랐다. 그러고 보니 곧 햅쌀이 나올 걸 알면서도 쌀이 똑 떨어지는 긴박한 사태에 직면할까 싶어 기다리지 못하고 구매했다. 밥솥 탓만 하고 있었는데 괜히 미안해진다.


 묵은쌀이라고 맛없는 밥을 먹을 수는 없다. 밥맛은 소중하다.

 묵은쌀도 햅쌀처럼 윤기 나고 맛있게 지어먹자.

 더 이상 간단할 수 없는 방법.

 찹쌀과 확연히 대비되는 묵은쌀

 쌀을 씻고 마지막 밥을 안칠 때 우유를 아주 조금만 부어주자.

 2인용의 밥을 하며 약 100ml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이 끝.

쌀밥에 우유라니 뜨악할 수 있지만 완성된 밥에는 우유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우유단백질이 쌀을 코팅하며 반짝반짝 윤기 나는 밥으로 탄생하고 묵은쌀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고 고소한 새 밥의 냄새가 풍긴다.


 압력솥 하나면 충분했고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싫전기밥솥은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또 전기밥솥을 사용하니 몹시 편하다. 저녁 먹을 시간을 딱 맞춰 예약버튼을 눌러 놓으면 밥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반찬은 이미 다 준비가 됐는데 배고프다는 랩을 들으며 뜸을 들이고 있던 인내의 시간이 사라졌다. 


워낙 작아 한번 밥을 지어 모두 먹는다. 보온 기능은 사용하지 않는다. 새 밥 해서 먹고 혹시 남은 게 있으면 얼린다. 요즘 밥솥은 신기하기도 하지. 냉동했다 녹이면 맛있다는 냉동밥 모드까지 따로 있다. 굳이 그걸 사용하지 않아도 새로 지어 얼렸다 녹인 밥맛은 훌륭하다.


막판에 상태가 좋지 않던 압력솥 밥을 한 달가량 먹다 만났으니 더욱 맛있고 반갑다.


이제 나에게도 맛있는 밥을 다 지었다고 알려주는 상냥한 쿠쿠가 생겼다.

몹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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