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에 따라 OO기로 이름 붙여진 범주들을 거쳐가다 보면 특정 시기에는 참으로 중요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그 존재조차 가물가물하게 된다.
수능.
내게는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는데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에게 시험을 잘 보라는 전화를 하며 그 존재가 나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나의 가족이 수능을 보는 날에는 내가 다 긴장하며 텔레파시를 쏴 주어야 한다며 시험 시간표에 맞춰 공부를 하기도 했다. 내가 수능을 보는 날이 다가왔고 긴장하지 않은 척했지만 전날 급체를 하고 몇 번이나 토를 했다. 나의 수능과 그 후의 선택은 아쉽고 속이 쓰려 돌이켜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는 이벤트로 남았다.
동생의 수능이 있었고 사촌들도 수능을 봤으며 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동안 수능은 나의 관심 속에 있었으나.
어느 순간 수능은 추운가 춥지 않은가, 그날 출근 시간이 한 시간이라도 늦춰지는가를 계산하고 아이를 데리러 나오는 차들로 도로가 꽉 막히니 버스가 아닌 지하철을 타야 하는 날 정도가 되었다.
친한 이의 자녀가 작년에 수능을 보았고 이제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와 줄줄이 이어질 조카들의 대입에 내가 긴장하고 있다. 수시 원서를 어디 넣을지 고민하느라 밤을 새웠다고 초췌하게 출근한 직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남 일이 아니구나 싶다. 자연스레 나의 아이의 학년을 묻고 이제 더 이상 놀리지 말고 영수 학원 정도는 꼭 다녀야 한다는 조언이 바로 나온다. 바뀐 대학 입시 제도가 발표됐다며 한글 문서가 카톡으로 날아오는데 난독증인가 제대로 들어오질 않는다.
이 와중에 우리 집 초등학생은 공부하기가 그렇게 싫다.
운동할 때 보이는 강력한 승부욕을 공부에도 조금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학교에서 중간중간 보는 단원 평가에서 오늘은 몇 개를 틀리고 오늘은 몇 개를 틀리고 이야기하며 이것도 실수고 저것도 아는데 틀렸고 하길래 아쉽다 했더니 다 맞고 안 맞고가 중요한 게 아니란다. 꼭 모두가 100점을 맞아야 하는 건 아니고 세상에는 이걸 잘하는 사람 저걸 잘하는 사람이 있고 하며 당당히 이야기하는데 수능 전 가장 중요하다는 멘털 관리를 이미 끝내 놓은 초등학생이 여기 있다.
수학 공부방 달랑 하나 다니면서 그 숙제하는 것도 그리 싫다.
학교 끝나고 숙제부터 하고 놀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은 모두 학원으로 가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날도 추운데 그네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다. 집에 가면 숙제하라고 할 까봐 못 들어간단다. 숙제는 이따 하고 쉬면서 간식을 먹으라고 하자 그제야 집으로 간다.
오밤중에야 숙제를 시작한 초등생은 방금 전까지 생기 발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책상에 앉아 있다. 화장실을 수없이 들락날락거리는데 심지어 화장실 갈 때는 표정이 밝다. 1년 전 아래 글을 썼을 때와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는 더 공부하기가 싫고 갱년기는 화가 많아져서 밤 10시 가까이에야 시작하는 숙제를 끝낼 때까지 큰 소리가 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