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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un 10. 2024

작은 부엌에 나만의 아일랜드 식탁이 생겼습니다

 딱히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 하고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때가 있다.


야채탈수기

건강검진과 신체검사

물가상승


 이 세 가지는 작은 부엌에 유일무이한 아일랜드 식탁을 만들어냈다.

 작은 집에는 물론 더 이상의 가구를 둘 곳이 없다. 아일랜드 식탁이 공중부양이 가능한 것이 아닌 이상 새로 들일 공간은 없는 참으로 작은 부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식탁을 가지게 된 자, 여기 있다.

 아주 오래전에 사은품으로 받아 집에 있었던 야채 탈수기. 사용할 일도 없고 부피도 커서 이미 기증한 지 오래였는데 야채탈수기를 사니 확실히 야채를 많이 먹게 된다는 지인의 말에 꽂혀 점점 야채를 멀리하는 가족을 위해 날름 사 온다. 그랬더니 정말 야채를 자주 사고 자주 먹게 된다.


 그 시기 건강검진에서 당장 수술을 해야 하니 마니 하며 이 난리 속에 대학병원 진료까지 받고 온다. 불과 2년 전 호된 경험을 통해 건강을 늘 챙기고 또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알아놓고 너무 안일했나 싶은 거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고 했는데 너무 정신건강만 챙겼나 반성을 한다. 여기에 신체검사에서 비만 두 글자를 확인한 아이를 위해 가공식품을 확 줄이게 된다.


 몸에 좋고 맛도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엄청난 외식비 상승으로 이제 이걸 남의 노동력을 빌어 밖에서 먹으려니 확연히 치솟은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아무리 외식 예찬론자라도 월급은 그대로니 결국 집밥을 늘리게 된다. 바로 조리할 수 있게 손질되어 있는 소용량 식재료는 투입된 인건비가 산정되어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으니 손질과 소분도 내가 한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자 어느 순간 부엌에 있는 시간이 몹시 늘어난다.

전에도 집밥을 해 먹었으나 그 빈도가 확 는다. 여기에 조리하기 편한 재료를 구입해 간단히 요리를 하다 채소와 야채를 담고 가공식품 대신 손질되지 않은 날재료를 사서 손질하고 소분하는 과정이 보태지자 집밥 해 먹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훅 늘어난다. 어느 순간 보니 글 쓸 시간도 잘 나지 않는다. 짬이 나면 마늘 꼭지를 까고 있고 여유가 생기면 대파를 손질해 넣고 있다. 매 끼니마다 야채를 다지면 힘드니 애호박, 당근, 양파, 대파를 한꺼번에 다지기에 돌려놓고 소분해서 담아두어야 한다. 오이도 당근도 쉴 새 없이 채칼질이다. 아침 설거지 방금 돌렸는데 점심에 먹을 식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에 없이 집밥과 요리에 매진하고 있다.

 그랬더니 예상 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작은 집에는  조리 공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조리대가 너무나 아쉽다.


 이런 뜻밖의 전개는 무엇인가.

이렇게 작은 부엌에서도 큰 불편함 없이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했거늘. 너비 80cm 폭 42cm의 부엌 수납장 위에 유리 대용 비닐 커버를 덮어 놓고 조리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게 너무 부족한 거다. 에어프라이어 올려놓고 뭐라도 돌리면 반만 남은 곳에서 도마를 놓고 칼질을 하는데 손질한 야채를 올려둘 그릇 둘 자리조차 없다. 이미 인덕션에는 조리 중인 냄비들, 그 왼쪽에는 양념통과 국자들이 놓여있고 작은 집의 가장 큰 테이블 위는 이미 식탁을 차리고 있는 중. 안 그래도 엉성한 칼질인데 좁은 판 위에서 참으로 용을 쓰곤 했다.

 나도 모르게 이사하면서 이미 포기했던 아일랜드 식탁을 또 들여다보고 있다. 폭 120cm. 역시. 너무 크다. 이걸 두면 부엌 옆으로 나다닐 공간도 부족할 테다. 그런데 또 요리할 때마다 영 좁고 불편하단 말이다. 또다시 이동도 가능하다는 보조 조리대를 검색해 보지만 지금 수납장과 높이도 너비도 딱 맞는 것은 없다. 그나마 비슷한 것을 찾았더니 언뜻 보아도 조잡하다.


이케아에서 테이블 받침대만 구입해 마음에 드는 석재 상판을 올려 근사한 테이블로 만들어 쓰고 있는 Y. 그녀가 보다 조리대스럽게 상판만이라도 세라믹으로 올리는 것이 어떻겠냐 한다. 귀가 번쩍한다. 정말 단 10cm가 아쉽다며 조잘조잘 이야기하다 보니 원 수납장 사이즈보다 상판의 크기를 키우는 아이디어까지 도달한 스스로가 몹시도 대견하다.


 그리하여 양 옆으로 딱 10cm씩 딱 20cm, 그리고 옆으로 딱 4cm가 늘어난 세라믹 상판을 올리기로 전격 결정한다. 상판이 도착할 날을 글자 그대로 손꼽아 기다린다. 지금까지 잘만 쓰고 있었는데 비닐 사이에 스며드는 물기가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고 수납장 밖으로 삐져나온 도마가 영 불편하다. 상판아 어서 오너라.

 드디어 상판이 도착한다.

 자로 재 가며 상판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수납장을 벽에 붙였다 떼었다 앞으로 밀었다 뒤로 넣었다 해가며 최종 완성된 나만의 아일랜드식탁. 특별히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색을 골랐더니 벽면의 타일과도 싱크대의 대리석과도 어울린다. 무엇보다 나무인 수납장에 돌을 올렸음에도 그 색과 질감이 몹시도 잘 어울린다.


길이 20cm, 폭은 단 4cm가 늘었는데 이렇게 조리 환경이 쾌적할 수가 없다. 한꺼번에 도마를 두 개 놓고 재료를 손질할 수도 있고 칼질한 도마를 치우지 않고 바로 나물을 무칠 수 있다. 비닐과 달리 음식 물이 배일까 걱정할 필요도 없이 물티슈로 슥슥 닦아내기만 하면 된다. 안 그래도 이미 깨끗한 상판을 몇 번이나 행주로 닦으며 삭삭 소리를 즐기고 있다. 단 20cm에 이렇게 만족감이 크고 요리가 즐거워 지다니.

 지금 글을 쓰며 마주하는 정면의 작은 부엌.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작은 부엌과 행복은 이렇게도 서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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