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그래야 한다는 사규가 있는 건 물론 아니지만 보통 윗 분들은 그들끼리 점심을 먹는다. 윗 분들과의 식사는 공식적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다.
그런데 사무실에서도 충분히 껄끄러워 최대한 피하고 싶은 상사 E는 부지런히 직원들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친분이 있는 직원과 어쩌다 '같이 먹을까?' 해서 먹는 게 아니라 규칙적으로 횟수를 정하고직원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약속을 정했다. 본인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통계 그룹을 묶는 듯했다.
평소에는 이 자리 저 자리 돌아다니면서 말을 많이 하는 E는 꼭 점심 약속만은 사내 연락망을 통해 해 왔는데 직원들은 연락망에 E의 이름이 뜨면 일단 긴장해야 했다. 늘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라고 묻지만 순진하게 맛 집 이름을 대서는 안된다. 몇 차례 학습한 직원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추천해 주시는 곳으로 갈게요~'하고 아니나 다를까 이미 장소와 메뉴, 심지어 커피 마실 장소까지 정해져 있는 상태다.
E는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윗 분들 모시고 점심 먹는 거 너무 재미없어. 나 그냥 듣고만 있잖아. 메뉴도 맨날 똑같고. 이렇게 직원들이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좋아요, 재미있고. 그리고 업무 시간에는 뭐 같이 말할 기회가 있나? 이럴 때라도 이야기해야지. 그렇죠? 딱딱하게 회의실 가서 이야기하는 거보다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할 수 있고 참 좋다."를순서만 조금씩 바꿔서 매번 이야기했다. '지금 본인도 우리가 싫은 거 알면서 이러는 거지?' 하는 눈빛이 오간다.
E와의 점심시간은 어느 시기냐에 따라 주제가 정해졌는데 주제를 망라하고 하나같이 다 불편했다.
인사철에는 팀에 지원한 OO를 잘 아냐며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캤고 업무 조정이 있을 거라는 시기에는 '요새 할만하죠?' 하며 은근슬쩍 업무를 떠넘길 포석을 깔았다. 'OO대리 요새 업무가 익었나 봐, 잘하더라고요' 하는 칭찬 같은 멘트에 아무 생각 없이 '네, 잘해요'라고 응수하면 그 대리에게 업무를 더 얹어주면서 '다른 직원들 의견을 물었더니 일 좀 더 할 수 있을 거라 하더라고.' 하며 '나는 주기 싫은데 다른 직원들이 더 주라 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더 주는 거다.'라는 고전적인 방어 멘트에 이름이 올라갔다. 평가 기간에는 'OO 팀장님이 자꾸 직원들 평가에서 승진이 미끄러지네. 우리가 좀 도와야 되지 않을까요? 당연히강요는 아니지만 점심 먹으면서 이 정도 이야기할 수 있잖아?"라며 조종하기도 했다.
이러니 밥이 제대로 들어갈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일까를 문장마다 분석해야 하고 대충 '네네'했다가는 본인이 원하는 대답으로 해석해서 이용당할 것이 뻔하니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해서 해야 했다. 입 다물고 밥 먹으면 여지없이 '아침에 무슨 일 있었어요?'라면서 어서 이야기하라는 압박을 해왔다.
점심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갈까늘 아쉬웠지만 E와의 점심시간은 오래 참았다 싶어 시계를 보면 5분이 지나 있고 이제 1시 됐겠지 하면 아직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근무시간보다 더 길고 더 힘든 한 시간이다. 왜 점심시간마다 이렇게 계략질인가. 하지만 몇 번 점심 식사를 거절하면 기어코 저녁시간에 약속을 잡으니차라리 회사에 있는 점심시간 한 시간으로 해결하자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