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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침묵의 의미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


보통 건강하게 성장한 아이였다면 기억에도 없을, 세 살 때 사건을 오십 초반의 나이가 되는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지독한 열병 탓에 죽을 고비가 있는 한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 말 듯, 토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는, 가족들이 아이의 팔과 다리를 잡으며 지켜보는, 어쩌면 생을 마감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을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오른쪽 청각신경이 아예 죽고, 왼쪽 청각신경만 약간 살아남았다. 내가 말소리가 이상하고 하던 말을 계속 반복하며 혼잣말로 우물쭈물하는 모양과 잘 듣지 못하는 상황을 알게 된 계기는 내 또래의 사촌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서부터다. 사촌 동생은“삼촌은 왜 그런 거야” 라고 했다. 결정적인 것은 친척들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내색하지 않지만 나를 달갑지 않게 쳐다보는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들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가, 갸, 거, 겨 보다 눈, 코, 입을 먼저 배웠다. 표정이 언어였다.


닭을 파는 가게에 사는 또래 소녀의 집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이 난다. 한창 즐겁게 놀던 나를 발견한 그녀의 아빠가 다짜고짜 그녀의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면서 “이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라고 화를 내면서 나를 쫓아냈다. 더 이상 그녀랑 놀 수 없었다. 또 찐빵만두집 아들인 친구 집에 인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 부모님이 방 안에서 만두를 빚고 계셨다. 그런데 친구 엄마께서는 내게 팔다 남은 찐빵 떨거지를 주시더니, 그것조차 주기 싫은 내색을 팍팍 내면서 “먹어라”고 했다. 또 친구 아빠께서는 뜬금없이 “네 부모가 귓밥을 안 파서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 친구도 앵무새처럼 그 말을 따라했다. 그 이후 친구와 소원해졌다. 그 친구가 나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부모님에게 말 뿐 아니라 나에 대한 감정도 앵무새처럼 따라한 모양이었다. 또 유년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키도 크고 잘생겼던 부잣집 친구인데, 당시 동네에서 가장 큰집에서 살았고 부자의 전유물인 야구장갑과 방망이를 함께 사용하면서 놀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나랑 놀 때면 그 야구장갑을 두 짝을 가져와 한 짝을 내게 빌려줬는데, 그 야구장갑이 그렇게 반짝여 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친구랑 놀 던 어느날, 친구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왔었다. 그러더니 친구에게 “얘랑은 절대 놀면 안 된다”라며 다음부터는 가까이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친구가 나를 피하는 것을 직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한다며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안은 가난했기에 나의 상태를 돌볼 형편이나 생각해줄 만한 상황과 여유가 되지 못하였다. 전문적인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엄두도 나지 않았으며, 생일파티 한번 하지도 않을 정도로 존재에 대한 귀함이 부족한 무기력한 가족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불교 신자였다. 한 달에 한두번 정도 다함께 경전을 공부하는 시간인 회합에 참석했는데, 항상 나를 데리고 다녔다. 거기에서 내가 배운 핵심 교리는 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인과응보, 즉 업보(業報)라는 단어다. 어려운 집안 형편 그리고 내가 귀가 잘 안들리는 상태는 모두 전생의 잘못 때문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지부장(지부별로 부처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우리 부모님과 나에게 열과 성을 다해 신심을 가지면 나의 귀를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타인을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해를 끼치면 안 되며 무조건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때부터 나와 부모님은 열심히 법당에서, 매일 집에서 염주알을 손바닥 사이에 붙이고, 무릎을 꿇고, 경전을 입으로 외었다. 동시에 나의 상태의 원인은 전생에 죄가 엄청난 탓이라는 게 기정사실로 되면서 나를 더욱더 위축하게 만들었고, 열등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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