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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거짓말하지 않고 거짓말쟁이가 되는 법

벙어리가 아닌데 벙어리로 불렸던 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당시 6학년이었던 누나의 육상선수 코치이면서 담임선생님이 전혀 일면식도 없었던 나를 부르더니 책을 주면서 “너 읽어봐”라고 했다. 내가 읽었더니 알았다,라며 나를 돌려보냈다. 당시 누나는 멀리뛰기 선수로 지역에서 유망한 선수였고 누나의 담임선생님은 애정이 있었기에 동생인 나의 상태를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며칠 후, 부모님이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병원 의사는 내가 평생 보청기를 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때 나는 보청기라는 세계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의사가 추천한 보청기 가게에 가서 보청기를 맞추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주머니 사정이 궁핍한 듯 난감하게 짓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보청기 값이 상당히 고가이지만, 그 당시에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 보청기는 나에게는 맞지 않는 보청기였다. 그 당시 기술력이 형편없었다. 모든 소리를 증폭하는 증폭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말소리와 주변 소음 소리가 모두 증폭되어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시끄러웠다. 이때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잘 들릴 거라는 기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청기는 다른 청각장애의 기본적인 이해 없이 만들어진 보청기였고, 눈에 보이는 담뱃갑 같은 투박한 사각형의 보청기라 어린 마음에 착용하고 싶지도 않았다. 몇 개월 쓰다가 착용을 그만두었고, 부모님은 거금이 아까운 한동안 한 소리를 했다. 그 이후 30대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보청기는 귓속보청기로 눈에 보이지 않고 주변 소음을 줄이면서 말소리를 더 명확하게 들려주는 보청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의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을 설득해서 병원에 가보라고 권유했던 것 같다.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는 것 자체가 전혀 나에게 관심이 없던 가족들이 움직인 놀라운 사건임에는 분명했다.


형과 누나들 사이에도 나는 오해의 소지를 가진 존재였다. “너 들리는데 안 들린다고 거짓말하는 거지”라며 머리를 박아, 손들어 등 군대식으로 나에게 벌을 하는 형, KBS 방송을 보면서 내가 방송국의 이름을 말하자 누나가 “[키비스]가 아니라 [케이비에스]라니까. 바보 멍청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K는 [키]를, S는 [스]로 발음했다. TV의 볼륨을 키우면 시끄럽다며 줄어서 듣는 가족들. 부모님은 신앙을 열심히 가져야 고칠 수 있다는 말만 무한반복 하는 정신 승리법만 고수했다.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가 한참 부족한 가족 환경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의 존재를 인지하였는지, 나의 어머니님과 상담하면서 왜 나를 낳으셨냐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님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웃어넘겼겠지만, 담임선생님의 껌 씹는 듯한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를 하찮은 존재로 보는 그 표정을.


당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하는 배고픈 사회였고 집단성이 강한 사회였기에 교실 한꺼번에 60~70여 명이 꽉 채워져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전체적으로 관리할 뿐 개별적으로 지도하는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회였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아닌 집단이 중요시되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구조 속에서 나의 단점을 자꾸 들추는 말들이 오고 가는 상황들, 개인 활동을 위축하게끔 하는 그런 말들이 나에게는 상당한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내가 말해도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듣기 싫다는 표정들을 익숙하게 보면서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입 다물고 침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으로 말미암아 학교 친구들 사이에는 벙어리가 아닌데 벙어리로, 귀머거리가 아닌데 귀머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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