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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주세요

– 저마다 이름 가진 갖가지 풀꽃들

by 김수정

나는 내 이름이 좋았다. 중학교 때까지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주변에서 보지 못했고 원래는 ‘수연’이라는 이름으로 지으려다 바꿨다는 아빠 말씀에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친구 중에 수연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담임 선생님은 20대의 젊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학생들은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셨던 선생님과 꽤나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수정이 너는 이름이 너랑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애~ 목소리도 그렇고 ~”

그날 이후 난 내 이름이 더 좋아졌고 뭔가 내 이름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이름은 생각보다 흔한 이름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나와 성까지 똑같은 ‘김수정’을 처음 만났고 대학에서도, 결혼해서 아이 키우며 만났던 분 중에도 같은 이름이 있었다. 그분은 자기 이름이 촌스럽고 싫다고 했지만 난 여전히 내 이름이 좋았다.


스물여섯 살에 친구들보다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어느 순간 내 이름을 잃어버렸다. 아이들 엄마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고 그게 더 자연스런 내 호칭이 되었다. 6~7년 전업주부로 아이를 키우며 나는 ‘수정이’가 아니라 ‘에미’이거나 ‘00 엄마’였다.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무렵 동네 언니를 따라 도서관으로 문화원으로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게 되었다. 그때였나 보다. 내 이름이 누구에게 불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 것이. 강사님들이 ‘00 엄마’가 아니라 ‘김수정 씨’, ‘수정 씨’라고 불러줄 때 순간 울컥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건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들판에는 수많은 종류의 풀들이 있다. 예쁜 꽃을 피워 사람들 눈에 띄어서 이름이 알려진 풀도 있지만 사람에게 쓰임새가 없다고 여겨지는 풀들은 뭉뚱그려 잡초라고 부른다. 봄나물로 많이 먹는 달래. 냉이. 씀바귀는 노랫말에도 등장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지만 뽀리뱅이, 지칭개, 광대나물, 주름잎, 별꽃처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사람들이 이름을 잘 모르는 풀들이 태반이다. 사실 사람들은 길가의 잡초에게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꽃이 피어도 너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봄이 되면 지천에서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꽃이 있다. 개나리도 진달래도 아니고 매화나 목련도 아니다. 사람들 발길에 채이는 낮은 곳에서 봄을 알리는 ‘큰개불알풀' 꽃이다. 이른 봄 깨어난 꿀벌들에게 꿀과 꽃가루를 나눠주고 사람들에게는 봄을 알리는 앙증맞은 꽃. 자잘한 꽃 수백, 수천 송이가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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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개불알풀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이름이 부르기 민망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해인 수녀가 큰개불알풀을 보고 ‘봄까치꽃’이라는 시를 썼다. 그 시가 시작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 모습에 비해 너무 안 어울린다며 좋은 소식을 알리는 까치처럼 봄을 알리는 꽃이라 하여 ‘봄까치꽃’이라 부르자는 이야기도 있다. 벌써 개명했다는 잘못된 정보도 나돈다.


하지만 여전히 이 풀의 정명은 ‘큰개불알풀’이다. 어째서 이 예쁜 꽃을 피우는 풀을 이런 민망한 이름으로 불렀을까?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꽃만 보지 말고 꽃이 지고 난 후 맺힌 열매의 모양을 보라. 바로 “아~~” 하게 된다. 그 이름은 눈에 확 띄는 꽃보다 다음 세대를 품은 열매 생김새에 더 의미를 둔 이름이다.


식물의 이름을 보면 어떤 식물은 부르기 민망한 이름도 있고 한 번 들으면 귀에 쏙 박힐 정도로 예쁘거나 귀여운 이름도 있다. 유래가 정확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생김새나 생태적 특징, 식용 가능 여부, 향기 등이 다양하게 이름에 반영된다.


줄기를 자르면 애기 똥처럼 누런 진액이 나와서 ‘애기똥풀’, 제비가 오는 시기에 핀다고 ‘제비꽃’, 꽃이 별 모양이라 별꽃, 꽃봉오리가 말려있어서 꽃마리, 꽃이삭이 강아지꼬리 같아서 ‘강아지풀’, 나도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고 ‘점나도나물’.


어렸을 때 나물을 캐러 다녔고, 여름방학 때는 식물채집 숙제도 열심히 했던 터라 나름 풀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태해설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풀이름은 정말 몇 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풀이름을 하나하나 알게 되면서 그 풀은 나에게 그저 ‘잡초’가 아니었다. 풀이름을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뭉뚱그려 잡초 중 하나일 때와 내가 이름을 알고 불러줄 때 그 풀을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진다.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가도 나는 알아보고 한 번 더 눈길을 주게 된다.


풀이 속삭인다. 나도 어엿한 이름이 있으니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달라고. 내 존재를 알아달라고.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순간 그 풀은 나에게 잡초가 아닌 그 ‘무엇’이 된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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