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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춥자

by 햇살처럼

12월 마지막 토요일 저녁, 을지로 신세계백화점 앞 도로를 지나는 길은 반짝반짝, 조수석에 앉은 커트머리 중학생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 여기 알아, 사람들이 사진 많이 찍는 곳이야, 예쁘다”. 아이 시선을 따라가니, 백화점 커다란 전광판에 빨간 LED 왕관이 생겼다 사라졌다가 반복. 도로에 선 사람들은 다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휴대폰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그냥 좋은 가보다.

사실,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있어 ‘윤석열 탄핵!’을 외치는 줄 알았다. 광화문 일대에 초등 아이들까지 나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니까.

에잇, 그래, 윤석열 ‘탄핵!’ 은 ‘탄핵!’ 이고 연말은 연말이지.

신세계 백화점 전광판을 천천히 여유롭게 감상하도록 차는 아주 느렸다. 그냥 주말이니까 했는데, 8차선(?)도로에서 한쪽 4차선(?)이 텅 비어있다. 그 많은 차들이 한쪽으로 천천히 줄을 서서 오고갔다. 뭐지? 했는데, 한참 내려오니 ‘윤석열 퇴진!’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큰 트럭이 앞장서고 그 뒤를 형광빛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이 앞장서고, 하얗고 노랗고 빨간 응원봉을 든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을 했다. 아! 이래서 한쪽 도로가 뻥 뚫렸구나, 공식적으로 집회.

차가 천천히 가도 괜찮았다. 창문은 조금 더 내리고 슬쩍 히터를 껐다, 밖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차에 넉넉히 있는 핫팩, 행렬이 바로 옆으로 지나가고, 아이는 뜯지 않은 핫팩을 만지작 만지작, 축제 같다, 아이는 행렬이 부르는 아파트를 따라 부르며 신난다. 자기도 가고 싶단다. 같은 방향이면 내려주고 한참 가서 만날 수 있는데, 우리가 역방향으로 가는 거라 내릴 수도 없고 그랬다. 괜찮을 거야, 추우니까 움직여야지,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다행이네, 체류탄이 없어서. 엄마가 중학생 때는 체류탄 연기 때문에 눈도 맵고 콧물도 나고 그랬는데, 연기도 무서웠고.

천천히 내려오니, 큰 트럭이 다시 보이고, 야광빛 조끼를 입은 사람이 앞장서고, 그 뒤에 응원봉을 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랫가락에 몸을 흔들면서 앞으로 행진했다. 앞서 간 사람들과 트럭 사이는 여유 공간을 두었다. 이태원 나이키에서 물건을 사고 오는 길이라, 그 공간에 시선이 오래 갔다. 이태원 나이키 부근에서 일어난 좁은 골목의 참사, 그 골목은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좁고 경사가 지고 그랬다. 지금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골목 한 쪽 벽면에 붙은 애도의 흔적들이 아니면 그 골목에서 150명이 넘게 사망했다는 걸 모를 거다. 대체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골목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온 터라 4차선(?)의 텅빈 도로와 트럭과 사람사이의 넓직한 여유 공간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집회를 이끄는 사람들, 안전요원, 집으로 오는 길은 시간이 점점 늘어났지만 차 문을 열고 마음만은 함께하다 보니 머리가 맑아졌다. 안국역으로 돌아 나오는 길부터는 속도가 났다. 몸은 집으로 마음은 그 행진을 따라.

누가 그랬다, 계엄이 선포된 날, 그날부터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깁스 푼 다리를 이끌고 집회에 나갔다고. 택시를 타고 여의도에 간다하니, 집회 하는 사람들에게 딱 데려다주었다고. 그래, 뭘 잘 못 했는지 모를 거야. 하지만 저리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나와 떨며 외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제주도에서 고등학생이 공부를 못하겠다고 여의도까지 왔잖아. 설상가상으로 비행기 사고로 인명피해가 났다, 한 해를 마감하는 끄트머리에. 이제 비행기도 무서워서 못 탈 텐데. 이제 그만, 다리가 안 좋은 누군가가 그냥 잠을 좀 편하게 잘 수 있게 해 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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