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카이로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래?

by 보니키임

2020년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다.


이미 카이로에서 지칠 대로 지쳐, 한국으로 귀국은 확정한 상태였고 19년에 서울에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20년 1월에 인도에 방문했다.


그놈의 '할 거면 제대로 할 거야', 병 때문이다.

한참 요가에 빠져들기 시작하던 시기고, 수련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델리행 비행기에 탔다.

델리에서 리시케시로 가는 슬리핑 버스를 타고, 요가마을인 리시케시에 도착했다.

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도착해, 락쉬만 줄라 다리를 캐리어를 끌고 건너 숙소에 도착했다.

리셉션 직원은 문을 잠그고 잠들어있었고 겨우 깨워 들어가 체크인 시간까지 로비에서 기다렸다.



Surrinder singh이라는 선생님의 수업이 궁금해 방문했고 수린더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스와시티 요가 아쉬람에서 TTC도 관심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곧 또 해외로 수업을 가시는 일정 있었다.


스와시티뿐만 아니라 리시케시 전역에 수많은 요가원이 있었고 어디든 워크인으로 들어가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비건요리가 대부분이고 조용하고 평온한 동네다. 그 와중에 한식당도 있고! 리시케시는 여기까지만, 다음에 더 해보도록 하고 :-)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코로나가 한국에서 심상치 않게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약국에서 마스크와 소독약을 잔뜩 샀다. 그리고 카이로로 가는 비행을 하던 날엔 인도에서도 코로나 환자가 발생 시작되었다.


카이로에 돌아갔을 땐 아직 감염자도 없었고 방역절차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그렇게 길게, 심각하게 지속될 줄은 몰랐다.


1,2주쯤 지났을까, 길에서 사람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지면에 깊이 깔린 인종차별에 중국인 혐오는 심해졌다. 그들 눈엔 아시안=중국인인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당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심각한 감염상태를 나타내던 때니까. (아마 대구 신천지 시점이었을 것 같다.)


이집트는 원래도 위생상태나 의료체계가 탄탄하지 못한 나라여서 정부에서 보다 엄격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연은 물론이고 개인 카페에서 시샤를 피는 것도 금지되었고, 시간이 흘러 통행금지도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봉쇄 조치가 시작되자 이집트도 국경을 닫기로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한국 외교부를 통해 알게 되어 공항폐쇄 전날 서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고 공항에 갔다.


한국이 조금 나아진 상태이기도 했고 만약 걸린다고 하면 아프더라도 한국에서 아파야 치료도 적절히 가능할 테니까.


체크인을 하고 짐을 보내고 출국심사까지 마치고 라운지에서 탑승을 기다리는데 한국에서 긴급이메일이 왔다. 아랍에메레이트에서 당일부터 한국으로 취항을 전면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감염상태가 심각해서 보호조치를 위해 한국행, 발 모두 중단한다는 것.

그렇다면 나는 경유지인 두바이에 갔다간, 서울로도 카이로로도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이면 이집트 국경도 봉쇄시작이니.)


바로 데스크로 가 이런 연락을 받았는데 확인해 달라니, 어! 근데 네 티켓은 두바이행이니까 문제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나는 그런데 나는 그럼 두바이에서 서울로 가지 못하지 않느냐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며 겨우 직원을 이해시키고 출입국 사무소로 돌아가 공항 내 경찰서를 거쳐 출국심사를 취소하는 심사를 거쳐 카이로에서 보낸 짐을 카이로에서 찾아 나왔다.


아주 다행인 점은,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 아랍에메레이트-한국 비행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카이로 공항은 다음 날부터 봉쇄가 시작되었고 언제 락다운이 끝날지는 알지 못했다.


이미 야간 통행금지는 시행 중이었고,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일을 못하니 돈도 못 벌고, 심심하고 우울하고,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었겠지만.


타국에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은 건 아무렴, 우울증에 최적화된 조건임엔 틀림없다.



그래도 한국에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온라인 클래스를 하기 시작했다.

거실이 넓은 집이었어서 컴퓨터 하나로 이론 수업도 안무수업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하고, 외국 댄서들에게도 수요가 생겨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영어로도 온라인 그룹수업을 했다.


몸으로 못 만나도 화면을 보고 열심히 따라와 준 우리 서윤샘, 그리고 지금은 인연이 닿지 않는 여러분께 감사를 전한다.

처음 해보는 온라인 클래스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한국에서도 이미 물리적인 수업엔 제약이 있던 터라 수업 듣는 선생님들도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잘 함께 해주셨다.


인도에서 배워온 수련은 또 집안 거실에서 계속되었고, 나는 카이로에 있지만 다합에 사는 다이버 혜미언니 그리고 소은언니와 함께 저녁마다 영상통화하면서 그룹 운동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벼룩의 습격이었다...


이집트는 볕이 굉장히 강해서 진드기나 벼룩이 생각보다 그렇게 살기 좋은 조건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얼마 전 바하레야 오아시스로 여행 다녀오며 내 침낭을 들고 갔다 왔는데 그 볕이 들지 않는 텐트 안에 살던 벼룩이 내 침낭에 옮겨 붙어 온 걸로 추정된다.



벼룩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진짜 진짜 진짜다!!!

일단 눈에 보이질 않으니 처음엔 베드버그가 인도에서 날 따라왔나 싶어 온 집안을 해 집고 진드기 퇴치 약품이란 약품을 다 사용해 봤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몸을 물어서 흉이 여기저기 너무 심했다.


정말 잠자는 게 두려울 수준이었다.

그 빈대가 내 피를 많이 먹었는지 자라나 어느 날 밤에 자려다 휴대폰 플래시를 갑자기 켰더냐 뭐가 번쩍 하고 뛰어올랐다.



그때 알게 되었다. 정체는 빈대라는 것을, 다음날 바로 플리범이라고 하는 한국어로 하자면 빈대폭탄이라는 약품을 사 와서 침실에 처리했다. 그 이후로 말끔히 사라져 정말, 그야말로 평온을 얻었다.


당시 가장 큰 재미는 요리였는데, 내가 너무 좋아하는 고메에서 식재료를 배달받아, (https://gourmetegypt.com/) 매일 맛있는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 삶의 큰 위안이었다.

피자 픽업 중 Waterway Cairo


요리하다 손을 한번 크게 베었는데 아직도 손가락에 흉이 어렴풋이 남았다.


문제의 손가락과 팔에 가득한 빈대자국


집에서 짬뽕도, 도가니수육, 꽈배기, 호떡도 해 먹을 정도로 요리 수준이 이 시기에 정말 급 상승했다.

매주 금요일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핏짜리아에 가서 포장도 해오고(락다운 시기에 식당 내 식사는 금지였다.)

그렇게 7월이 되어서야 국경봉쇄가 끝이 났고 드디어 서울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드디어, 이집트에 사는 한국여자는 끝.

카이로-서울 여자는 시작:)


한국에 와서도 수업을 물리적으로 하는 데는 꽤 오랫동안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배운 것은, 상황에 맞추어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지지하고 나를 응원해 주는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


무엇보다 건강만큼 소중한 것은 없고 일상의 사소한 많은 것들은 특혜라는 것.

연말을 보내고 있을 여러분께도, 이 일상의 사소한 많은 것이 온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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