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에서 서울로, 그리고 수재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락다운이 끝나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천에 도착해서 pcr 검사를 받고, 음성판정 후 2주간 격리를 끝내고 나오니 오랜만에 만나는 정말 습한 여름이었다. (카이로는 40도가 훌쩍 넘는 일이 잦아도 건조하기 때문에 한국 여름처럼 힘들지는 않다.)
한국에선 지낼 곳도 없어서 한 달 정도는 엄마와 함께 지냈다.
그 시간 동안 스튜디오를 꾸릴 준비를 했고 적당한 위치에 맘에 드는 곳을 찾아 계약했다.
이미 댄스 스튜디오로 활용되던 곳이라 인수를 하고 큰 공사는 없이 2주 정도의 정비시간을 가지고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재정상황이 썩 넉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웬만한 수리는 직접 했다. 바닥 공사만 전문가에게 맡겼고 나머지 페인트칠, 시트벽지를 바르는 일, 스위치나 조명을 바꾸는 일도 처음인데 꽤 능숙하게, 무엇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설레어 기뻐하며 했다. 스튜디오에 필요한 가구들을 주문해 조립하기도 했고, 천장까지 청소하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여기저기 다치기도 했고, 손도 베었고 그럼에도 계속 작업은 했어야 해서, 약을 발랐지만 습한 환경에 2주 내내 손을 쓰다 보니 지금도 오른손에 흉이 남아있다.
스튜디오 오픈을 할 때에 이미 코로나가 꽤 심했던 터라 당장 돈이 벌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픈 즉시 실내체육시설 영업 중단과 제약으로 거의 6개월은 문을 닫은 시간이 더 길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이집트에 살면서 배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기로 했다.
근처에 미술학원에 다니고, 하타요가 수련을 더 해보고자 강사 자격증 과정도 등록했다.
새벽에 일어나 수련을 가고 돌아와 강아지들을 산책시키고 (엄마의 강아지인데 내가 당분간 맡았어야 했다.)
수업이 가능할 때는 수업을 하고 그게 어려울 땐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거나 쉬었다.
영업 제한이 어느 정도 완화가 되었을 땐 저녁에도 수업을 했고, 나도 요가 수련도 운동도 남는 시간 동안 열심히 다녔다. 스튜디오도 차즘 자리를 잡고, 다시 한국에서 기획공연 준비를 시작하고 국립극장 대관 심사도 통과되는 기쁨을 맛봤다.
그렇게 만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2020년 8월 8일.
여름 내내 지겹도록 내리던 비는 그날따라 더 강하게 내렸다.
저녁 8시에 수업을 마친 근무하시던 강사선생님이 퇴근하시는 걸 보고, 나도 나가려다 비가 아무래도 너무 많이 와서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오는데 천둥번개가 너무 크게 쳐서 놀랐다.
스튜디오에서 랩탑으로 영화를 틀고 기분 좋게 도시락을 먹기 시작하는데, 홀 쪽에서 비가 강하게 내리는 소리가 나, 그쪽으로 향해보니.
이미 건물 내벽이 다 젖어버렸는지, 지하 천장 일부에서 그야말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놔야겠다고 휴대폰을 들고 촬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튜디오에 있던 두 출입구 양 방향에서 비가 엄청난 속도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당황해서 임대인에게 바로 전화를 걸고 이야기를 하는데 조명이 번쩍이고 5분도 흐르지 않은 사이에 이미 물은 내 무릎높이까지 차기 시작했다. 전기를 먼저 내렸고 임대인분이 거기서 뭘 챙길 생각하지 말고 우선 밖으로 나가셔라,라고 말씀하셔서 휴대폰을 들고 바로 밖으로 나오니, 이미 스튜디오가 있는 골목은 내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른 상태였다.
하필 휴대폰도 충전을 해놓지 않아서 휴대폰도 꺼져버렸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고, 우선 친구집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수역은 이미 침수로 폐쇄가 된 상태였고, 다시 걸어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역삼역에서 내리니,
언덕 위의 역삼역은 다른 세상처럼 멀쩡했다.
친구집에 도착해 정리를 하고 새벽에 다시 나와 친구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건,
이미 다 분리 돼버린 홀 바닥과 무너져버린 조명과 가구, 그리고 수십 개의 나의 상장들은 물에 불어나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무거운 트로피들은 물아래 잠겨있거나 부서진 듯했다. 복도 쪽 전기가 완전히 차단된 것 같지가 않아 불안해서 우선 자리를 떠났다.
임대인분은 연세가 있으셨고 관리하는 자녀분들이 주로 소통을 했는데, 임대인의 따님께서 골목의 다른 가게들은 물을 다 빼고 있으니 나보고 양수기를 빌려다 지금 들어가 물을 직접 빼내라는 말을 하셨다.
그래서 내가 혹시 들어가 보신 거예요?라고 물어봤더니, 물이 너무 차서 들어가 보진 않았어요.라고 답했다.
이미 바닥과 인테리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것들이 무너졌고 나는 그때의 상태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순간, 실내 천장에서 물이 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떨어져 내리고 5분도 되지 않는 순간에 스튜디오 전체가 잠기는 것을 목격하고, 내가 도어스타퍼를 자리에 두지 않았더라면 문을 열기 조차 어려웠을 순간을,
2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니까.
이틀이 지나 소방서의 도움으로 고인 물은 제거하고, 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수리는 어떤 게 필요한지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처참한 상태였다.
상장, 트로피, 사진들이 토사물에 뒤엉켜 있을 땐 마치 내 지난 인생 전부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았다.
한벌에도 몇십, 몇 백만 원하는 내 의상들은 그 빗물에 쓸려나갔고, 다행히 높은 부분 라커 안에 있던 의상은 세탁해 살려낼 수는 있었다.
바닥 쪽에 있던 전자기기는 전부 폐기했어야 했고 기타 인테리어 자재들도 모두 물에 불어나 분리되어 있었다. 하필 나무소재가 많은 탓이었겠지.
인테리어는 다 손상되었고 내벽도 말리고 재 공사를 하는데만 예산이 최소 3천만 원 이상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려면 우선 현금이 더 필요한 건 작은 문제였고, 그렇게 애정을 갖고 꾸린, 그 공간에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우선은 스튜디오를 정리한 후 다른 공간을 찾는 게 더 좋겠다고 판단한 이유다.
멘털이 털려도 털려도 탈탈 털렸을 때, 가장 힘들었던 사실은.
내 가족 중 누구도 나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혼한 가정에서 컸고, 두 분 모두 양육에 힘쓰지 않았기에 언제나 기대가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 자식이라면,
뉴스에서만 봐도 힘겨워 보이는 그 현장을 자식이 겪는다면, 나는 가장 먼저 찾아갔을 것 같다.
나는 내 모든 걸 한 순간에 잃었는데, 스튜디오와 내 지난날의 추억 자체를 잃은 것보다 힘든 건 이 세상에 마음 놓고 기댈 곳이 영 없다는 사실만큼 더 힘든 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에겐 너무 좋은 친구들이 있어, 그녀들 덕분에 여러 일을 순조롭게 잘 해결했다.)
수업은 이후에 대관을 해서 이어갔다. 사고가 나고 1주일 정도를 쉬고 바로 수업도 했고 운동도 수련도, 일상에 별 다를 일 없이 살아냈다.
나는 그래야만 하는 아이니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나는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갔다.
주변에서 역시 연수는 강하고 대단해라는 말을 들으며, 더욱 그 생각은 강해졌다.
나는 무너져 내리면 안 되니까, 나는 기댈 곳이 없으니까, 나는 돌아갈 집이 없으니까.
물론 지금도 여전히 스튜디오로 인한 부채와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있지만,
현재는 나 스스로 내 두 발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강하게 믿는다.
그건 이 수많은 경험들이 반증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때로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있으면 그 무게가 온전히 내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부담감이 더 큰 무게로 다가와 고통스러웠다.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은, 손을 뻗으면 내 손을 잡아줄 좋은 사람들이 있고 삶은 절대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25년이 되니 한국에 돌아온 지도 만 4년이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스튜디오를 열고 닫고, 다시 해외에 잠시 공연을 하러 떠나갔다 오기도 했고, 수련과 운동도 열심히 했고,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국립극장에서 3번의 공연을 올렸고, 내년이면 국립극장에서만 4번째 공연을 올리게 된다.
2024년의 키워드는 '자립'이었다. 오래도록 혼자 지내왔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어딘가에 동요되어 왔다.
누군가의 마음이 상할까 봐 또는 그 마음에 들지 못하면 거절되는 감정을 받아왔다.
그것이 내 마음과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고 그것이 기준이 되는 삶을 살았다.
2025년 올해에는, 스스로를 향한 믿음이 더욱 강한 확신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그래서, 안녕 서울? 나 여기서 계속 잘 살아볼게, 잘 도와줄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