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우리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사고하고, 말하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이 ‘나’는 분명 내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바꾸면 이 믿음은 허약한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방식보다, 타인이 나를 해석하는 방식이 더 오래 남고 더 넓게 퍼진다. 결국 정체성은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과 언어를 통해 구성되는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이 지점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인간은 “내가 누구인가”보다 “나는 어떻게 불리고, 기억되고, 이야기되는가”로 존재한다. 내가 나를 해석하는 시간보다, 타인이 나를 판단하고 소비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입, 내 표정을 해석하는 눈빛,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들이 결국 정체성의 재료가 된다. 우리는 ‘실제의 나’로 살아간다기보다, 타인의 인식과 서술 속에서 끊임없이 편집되고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지워지고, 수정되며, 때로는 왜곡된 채 사라진다. 죽음 이후까지 남는 것은 몸도 사유도 아닌 이미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나의 정체성을 계속 연장한다. 그것을 불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존재의 흔적을 빌미로 한 정체성의 상실일까. 타인이 만든 초상 속에서 사라지는 삶은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자아의 이탈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질문이 시작된다. ‘나’라는 감각은 어디까지 내 소유일까. 내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선언해도, 누군가는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진술 중 무엇이 더 진실한가. 혹은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정체성은 자아의 문제인가, 아니면 타자의 해석에 기대어 있는 유동적 구조인가. 우리는 스스로 존재한다기보다, 타인의 언어·표정·해석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나’라는 실체는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아는 방식, 내가 되고 싶은 나, 타인이 해석하는 나,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는 나.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며 정체성의 윤곽을 만든다. 그렇다면 불멸이란 내 존재의 지속이 아니라, 나를 대체한 이미지의 생존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스스로를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다. 문제는 그 기억이 언제나 내가 동의한 형태는 아니라는 데 있다.
정체성은 내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호출할 때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무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대 위의 배우라기보다, 조명과 음향 뒤에서 이름만 남는 그림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