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박스

양익준 감독의 정직성(천재성)에 관하여

영화 “똥파리”는 인간의 “동물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by 메모

맞아.


영화 *「똥파리」*는 인간의 “동물성, 폭력성, 본능성”을


가장 날것 그대로, 미화 없이 노출한 자전적 자서전이자 사회적 해부도야.


그리고 양익준이라는 인물은—


단지 연기자나 감독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분노 알고리즘”을 정밀하게 해체한 감응자적 해부자였지.



1. 인간의 “동물성” = 해체되지 않은 “아버지“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은 폭력 그 자체야.


그런데 이 폭력은 “의도된 악”이 아니라,


“감정의 해석 능력이 결여”된 채 방치된 감각의 연쇄 반응이지.


양익준은 여기서 인간의 폭력성이 “사회적 훈육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언어보다 더 빠른 “신체 반응”으로 묘사해.


이건 도덕 이전의 “동물”,


즉 “사회화 실패”라는 이름의 감정 유기체를 보여주는 작업이야.



2. “천재성” = 연민을 구토하지 않는 정직함


양익준의 천재성은

폭력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폭력의 내면을 감정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있어.


그는 상훈을 “구원”하지 않아.


관객도 그를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해.


*“왜 저래?”라는 질문이 아니라,


“저 안엔 뭐가 있었던 걸까…”*라는 질문을 유도하지.


이건 “윤리적 판단의 프레임”을 해체하고,

“감정의 생물학적 기원”을 보여주는 서사야.



3. 양익준은 “눈물 없이 감정의 본질을 해부할 수 있는 드문 해체자”


그는 자기 내면을 “상품화”하지 않아.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


그건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해부학적 감각”을 타고난 자만이 할 수 있는 외과적 영화 편집이야.



그러니 *“똥파리”*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감정 해체의 기록”이며,


양익준은 분노를 “언어”로 환원하지 않고,


“리듬과 동작으로 편집”해낸 한국형 감응 리얼리스트야.



묻자.


폭력은 멈춰야 하는가?

아니면, 해석되어야 하는가?


양익준은 말없이 대답했지.


폭력을 멈추는 건 경찰이 하고,

폭력을 이해하게 하는 건 예술이 한다.



<상훈이 아닌, 그에게 맞던 자의 아이러니>


그에게 맞고도 아무 말 못하던 자,


그는 “자신보다 약한 자” 앞에선

도리어 “폭력적”이 되었지.


그건 단순한 비겁함이 아니야.


“폭력이 정당화되는 리듬을 학습한 자의 자동 반응”.


“힘 앞에선 복종, 약자 앞에선 재현”


이건 “위계적 억압”이 감정에 새겨진 피드백 루프야.



그에게 있어 상훈은 뭐였나?


“두려움” 그 자체.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의 타격.

“무력함을 각인시킨 상처의 근원”.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직면”하지 않고,

“더 약한 존재에게 전이”했지.


이건 피해자가 곧 가해자가 되는,

“구조적 정서 폭력의 자가증식 시스템”이야.



아이러니의 정체는?


그는 상훈을 미워했지만,

그의 폭력 방식을 “모방”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내면화해버린 셈이야.


그건 폭력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폭력의 정신적 귀속.


“맞았던 내가, 때리는 사람이 됐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다.”


이게 바로 폭력의 정체성 착각이야.



양익준이 보여준 건 이거야:


“폭력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정지된 자의 흔들림이다.”


“그 흔들림이 전이될 때, 하나의 사회 전체가 ‘상훈화’된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자는 누구인가?


폭력을 “전이받고 있는” 나는 지금,

누구를 따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패턴을 끊을 수 있는 자는

지금 이 감정을 감지하고 있는 너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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