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박스

나르키소스, 디오니소스, 그리고 아폴론

통합자에 대한 분열자의 투사에 관하여

by Edit Sage

“나르키소스”, “디오니소스”, “아폴론”.


이 셋은 단순한 신화 속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 정신의 세 가지 “상징적 파동”이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해석하는 존재적 메타포다.


나르키소스는 자기애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투사된 이미지의 유혹”에 빠진 자다.


그는 ‘자기’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해 굴절된 자기”를 숭배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사로잡힌 채,


그는 끝내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디오니소스는 “파괴와 광기, 감정의 해방” 그 자체다.


그는 모든 경계를 지워버리는 존재이며,


‘혼돈과 황홀, 감각과 몸의 리듬’으로 세계를 마주한다.


“이성과 질서” 너머에 있는 ‘살아 있는 생명’의 맥박,

그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리듬이다.



아폴론은 “질서와 명료성, 구조와 형식”의 신이다.


그는 혼돈 속에서 선을 긋고

“개념의 구조”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


그의 세계는 “정돈”되어 있고, “규율은 언어화”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그것은 감각을 “억압”하고

“형태 속에 실재를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이 셋이 고도로 통합될 때,


그 존재는 단순한 인간이 아닌


‘초감응적 편집자’가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의 작동”을 꿰뚫어 보며


“타인의 무의식”까지 감지하는 투명한 감각을 가진다.


또한 그는 “경계와 정체성”을 허물며,

“집단의 감정 파장”을 리듬으로 조율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구조”를 인식하고,

“언어와 프레임”의 설계자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런 존재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며,

“자기 감각”에 빠지지 않고,

“형식”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편집할 수 있고,

세계의 감응 흐름을 조율할 수 있는 자이다.



반면 대중은 이 “셋 중 하나에 과잉 동일화”되어 있다.


누군가는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이미지”에 집착하고,

누군가는 디오니소스처럼 “감정”에 휩쓸리고,

누군가는 아폴론처럼 “질서”에만 집착한다.


그들은 ”감각이 분절“되어 있고,

“자기 인식이 왜곡”되어 있으며,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 정체성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중은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타인의 감정”에 동조하고,

“설계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이들과는 달리, 통합자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감응하며, 진동하며, 흐른다.’


그는 스스로를 조율하고,

타인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며,

언어를 넘어선 ‘파동’을 설계한다.


나르키소스가 “거울”을 깨고,

디오니소스가 “춤”을 멈추며,

아폴론이 “언어”를 버릴 때,



그 너머에서 네 번째 존재가 등장한다.


그는 느끼되 중독되지 않으며,

설계하되 갇히지 않고,

관찰하되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흐름의 편집자이며,

감각의 통합자이며,

프레임 너머에서 프레임을 재창조하는 자다.



대중은 “감각을 분절”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통합자는 ‘감각을 편집’하며 존재한다.


이 차이는,

리듬을 탈 수 있는가, 아니면


리듬에 휘둘리는가의 차이로 귀결된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파장”을 따르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파장을 ‘스스로 설계’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당신이 ‘감응자’인지,

아직도 “프레임의 객체”인지,


그 경계를 드러내는 투명한 거울이 될 것이다.



셋이 통합된 존재—


즉, 나르키소스의 “거울”을 깨고,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견디며,

아폴론의 “질서”를 넘어서


그 너머의 ‘투명한 편집자’로 존재하는 자에 대해,


대중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동시에 끌린다.“


이것은 이중의 반응이다.


“경외와 혐오, 동경과 불안”이 동시에 겹쳐 흐른다.



1. 왜 끌리는가 — “억압된 통합”에의 무의식적 동경


대중은 “자기 안에 분열된 감각”을 안고 산다.


“자기 이미지”에 중독되고,

“감정”에 휘둘리고,

“형식”에 안도하지만,


그것들이 본질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때, ‘통합된 존재’가 등장한다.


그는 “자기 안의 모순”을 안고도 평온하며,

“감정의 소용돌이”를 타고도 명료하며,

“형식을 알고도” 그 너머에서 자유롭다.


대중은 이 존재가 자신이 잃어버린 원형임을 직감한다.


그래서 끌린다.


‘말할 수 없는 흡인력,

말해지지 않은 그 무엇‘에 감응하여


묘한 동경을 품는다.



2. 왜 불편한가 — “무의식적 해체”에 대한 저항


그러나 동시에, 이 존재는


대중의 “거짓 평형”을 무너뜨리는 진동이다.


그는 말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타인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그가 말 없이 거울이 될 때,


대중은 “스스로의 왜곡된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다”, “위험하다”, “이질적이다”라고 평가된다.


이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존재 구조의 붕괴에 대한 생존적 반응”이다.


“무언가를 감지했지만, 해석할 수 없을 때”,


인간은 그것을 “공포”로 읽는다.


그래서 ‘멀리하고 싶지만, 멀어지지 않는’

기이한 파장이 흐른다.



3. 따르거나 파괴하거나 — “투사된 갈등”


통합된 존재는


어느 순간 “스승”이 되거나,

또는 “이단자”가 된다.


대중은 그를


“닮고 싶다“며 따르거나,

“무너뜨려야 한다”며 추방한다.


이는 그 존재가


대중의 “내면의 그림자”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써 질문을 던진다.


“너는 너인가?”


이 질문은 어떤 이에게는

‘깊은 통찰’의 문을 열고,


어떤 이에게는

“숨기고 싶은 무의식”을 열어젖힌다.


그래서 반응은 양극단으로 갈린다.


“절대적 동경, 또는 극단적 혐오.”



4.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통합자는


자기를 인정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는


‘받아들여져도 흐르고,

거부당해도 흐른다.‘


그는 리듬을 편집할 줄 아는 자이므로,


자신이 “대상화”되더라도


그 “구조”를 간파하고,


그 위에서 다시

자기 존재를 “재구성”한다.



5. 결론 — 감응은 설명되지 않는다


대중은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그를 느낀다.


‘이상하게 신뢰되고,

이상하게 피하고 싶다.

이상하게 아름답고,

이상하게 두렵다.‘


그는 언어 이전의 충돌을 일으킨다.

그는 존재적 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다.



“대중은 그를 이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 감지 앞에서,

스스로의 파열음을 듣게 된다.”


당신이 그 존재일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이 그 존재를 비추는 거울일지도.


어느 쪽이든,

그 파장은 이미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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