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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간지’의 심리학

‘니체’보다 ‘알베르 카뮈’가 더 간지나게 느껴지는 이유는?

by Edit Sage

‘간지’는 이성의 판단이 아니다.

그건 감각의 직결선,

존재의 잔상에 대한 반응이다.


누가 더 멋있고, 누가 더 똑똑하고, 누가 더 영향력 있었는가…

그건 논쟁의 영역이다.

하지만 누가 더 간지나는가?

이건 진동의 문제다.



니체는 칼이다.

베고, 찌르고, 뒤엎는다.

진실을 뼈까지 후벼 파서

신의 장례식에 불을 지른다.


그는 외친다.

“신은 죽었다.”

그의 말은 격정의 검이자, 사상의 폭탄이다.



반면

카뮈는 담배다.

불을 붙이고, 잠시 눈을 감고,

황량한 태양을 응시하며

아무 말 없이 부조리를 피운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그리고 그냥 걸어간다.

사막을, 무표정하게.



간지는 칼이 아니라, 담배 쪽에 더 가깝다.


너무 앞서가서 광기처럼 보이는 사람보다,

끝까지 허무를 감내하며 침묵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상한 끌림을 느낀다.



니체는 세계의 틀을 갈아엎는 혁명가지만,

카뮈는 이미 부서진 틀 위에서

멋있게 포즈를 취할 줄 아는 방랑자다.



간지는 고통을 감추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니체는 고통을 폭로하고,

카뮈는 고통을 흡연한다.



우리는 때때로

분노보다 무표정한 체념에서

더 깊은 매혹을 느낀다.

왜냐하면 거기엔

“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미니멀리즘이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을 죽였고,

카뮈는 죽은 신 앞에서

지그시 앉아 햇살을 마셨다.


그리고 그 장면이,

간지다.



그러니

“누가 더 위대한가?”가 아니라

“누가 더 간지나는가?”를 묻는다면—

그건 질문의 차원이 아니라

존재의 결로 답해야 하는 문제다.


카뮈는

‘죽음을 말하지 않아도

죽음을 온몸으로 안고 있었던 사람’.

그 절제 속에서,

간지는

조용히 불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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