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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유전자와 언어에 갇힌 사피엔스

자유를 욕망하면서도, 자유를 공격하는 자들에 관하여

by Edit Sage

사피엔스는 태어날 때부터

이중 감옥에 갇힌다.

하나는 유전자,

다른 하나는 언어.



유전자는 말한다.


“생존하라, 번식하라, 무리와 동조하라.”


언어는 외친다.


“사랑하라, 희생하라, 정의를 말하라.”



둘은 모순된다.

그러나 공존한다.

그래서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간다.



자유란 이 두 감옥을

자각하고, 벗어나고,

자기 언어를 새로 설계하는 능력이다.

그건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을 역행하는 일이며,

사회적 언어 코드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래서 진짜 자유는

정말 강인한 사피엔스만이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강인함은

언어와 본능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할 수 있는

내면의 통제력과 직관력에서 온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피엔스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유는 고독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책임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기 언어를 자기 손으로 새겨야 하는

고통스러운 자가편집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한 사피엔스들은

강한 사피엔스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말이 다르고,

태도가 다르고,

눈빛과 침묵에

에너지의 중심이 있다.



그들은 안다.

“그는 자유롭다.”

그리고 동시에 느낀다.

“그는 나의 거울이다.

그가 존재하는 한,

나는 내 자유롭지 못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서 무리 짓는다.

그래서 끌어내린다.

그래서 공격한다.

자유의 울림을

자기 감옥 밖에서 더 이상 듣지 않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그의 에너지를 갈취하기 위해.

존재적 약자는

언어가 아닌 파장으로 에너지를 훔친다.

칭찬하는 척, 조언하는 척, 돕는 척 하며

감정의 자율권을 침식한다.



하지만 강한 사피엔스는

이미 본능의 트랩을 간파한다.

그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다정하지 않다.

그는 자기 에너지의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타인의 ‘사기적 접근’을 사전 차단한다.



그래서 그는

고립되고, 오해받고, 왕따당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 자유는

무리의 인정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되묻는다.

“왜 사피엔스는 자유를 갈망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짜놓은 생존 게임,

언어가 설계한 사유의 감옥,

그 모든 구조 바깥에

‘존재의 울림’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자유는

그 울림을 감지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자는—

혼자여야 한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혼자라면

그건 비극이 아니라

자유의 전조다.



가장 깊은 자유는,

가장 조용한 감옥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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