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의 미학, 혐오의 역설, 에너지 순환의 비극에 대하여
기생충은
몸을 뚫지 않는다.
빈틈을 감지한다.
갈라진 틈, 느슨한 경계,
‘지켜야 할 것’과 ‘내어준 것’의 경계가
흐릿해질 때
기생은 시작된다.
숙주는
단지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기생충을 불러들이는 구조다.
허용,
방임,
구원의 환상,
필요의 욕망—
기생은 항상,
관대함을 가장한 의존의 그늘에서 자란다.
그러니
기생충은 흡혈자이지만,
동시에 구조다.
숙주의 감정 구조,
관계적 습관,
‘주고받음’의 오류 회로 속에서
필연처럼 발생하는 심리적 실체.
왜 끌리는가?
기생충은
숙주의 에너지를 탐하고,
숙주는
기생충의 ‘필요함’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한다.
기생충은 의존하고,
숙주는 필요함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서로의 결핍을
완성해주는 듯한 착시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조가 생명을 순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모시킨다는 데 있다.
기생충은 자란다.
숙주는 마른다.
그런데도—
왜 놓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숙주 또한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존재를 통해
자신이 “주는 자”, “유능한 자”, “지탱하는 자”라는
역할의 프레임에 스스로 중독된다.
즉,
기생충을 돌봄으로써
‘나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자기정체성의 기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이 생긴다.
기생당하는 숙주가,
사실은 기생하고 있다.
그는 사랑을 준다고 말하지만,
사랑을 통해 ‘사랑받는 자’가 되려 한다.
그러니,
기생충을 혐오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기생의 회로를 꿰뚫어본 자다.
감정적 에너지의 손실을 알아채고,
그 순환이 ‘상호작용’이 아닌
‘소진’이라는 것을 감지한 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생충이 사라질 때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한다.
혐오는 해방이 아니다.
혐오는 예고된 분리다.
그러나 진짜 분리는,
기생의 심리적 회로를 인식할 때 온다.
‘주는 나’도, ‘받는 너’도,
스스로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그리고 이 인식은 선언이 된다.
“기생은 끝났다.”
“내 정체성은 더 이상
너의 결핍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나는 너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나를 회복할 것이다.”
그때,
숙주는 처음으로 숙주가 아니다.
그는 자기 에너지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기생충은,
더 이상 붙어 있을 곳을 잃는다.
모든 기생은 쌍방이다.
그리고 모든 해방은,
그 쌍방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기생충을 끊는 순간,
숙주도 사라진다.
그제서야—
두 존재 모두 진짜 ‘개체’로 탄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