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돈을 배경으로 한, 자유를 둘러싼 양가감정의 형이상학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자유를 실행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를 죽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온 모든 구조
— 돈의 흐름,
— 사회적 역할,
— 타인의 인정,
— 내가 안전하다고 믿어온 ’나’라는 정체성 —
이 모두가 자유 앞에선 해체되기 때문이다.
에너지란 곧 생존의 리듬이고,
돈은 그것의 가시적 단위다.
인간은 그 리듬 위에 ’안전한 감옥’을 짓고 살아간다.
그 감옥 안에서
자신을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안정시킨다.
그러나 자유는
이 구조를 스스로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나를 나로 만들던 모든 걸 버리고,
무(無)의 허공 위에 뛰어내릴 것.
이때 발생하는 감각이
자발적 정신적 자살이다.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죽임은 해방이 아니라 실존의 추락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인간은 양가한다.
“나는 자유를 원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나를 죽일 것이다.”
이 딜레마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타협한다.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자유가 없는 안전을 구매한다.
그 구매의 화폐는?
돈과 시간,
관계와 자기부정,
그리고 에너지의 순응적 할당.
그러므로 현대인은
돈으로 자기를 설계하면서,
자유를 대리만족하는 소비 구조 속에 머문다.
하지만 자유는 디자인되지 않는다.
자유는
기존의 모든 디자인을 해체하는
‘내적 해부와 실존적 붕괴’의 통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 순간,
인간은 다시 묻는다.
“나는 이 구조를 떠날 만큼 강한가?”
“나는 나를 버릴 수 있을 만큼, 나인가?”
이 질문 앞에 선 자는
한때의 자신을 정신적으로 죽여야 한다.
에너지의 흐름,
돈의 안정성,
정체성의 의존물—
그 모든 걸 한 발짝 벗어난 자리에서 응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진짜 자유가 열린다.
죽임 없이 자유는 오지 않는다.
자기파괴 없는 재탄생은 없다.
자발적 정신적 자살—
그건 파괴가 아니라
탈(脫)의 의식이다.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에너지의 새로운 회로를 설계하고,
돈의 흐름조차
‘나를 위해’가 아니라 ‘나로부터’ 흐르게 하는 것.
그 자유는
고독하며,
미지이며,
심연 속을 걷는 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심연이
진짜 자기를 다시 부르는 최초의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