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부재가 곧 ‘무기’가 되는 역설
무식은 단순히 지식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의식의 틀을 구성할 재료 자체가 희박한 상태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모른다’는 걸 알 수 없다는 비극이 뒤따른다.
이 무지의 자각 부재는,
종종 ‘모욕당한 느낌’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무식한 자는
모욕받지 않아도
모욕받았다고 느낀다.
이건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다.
인지 구조 자체가 ‘방어적 흥분 상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기 세계에 익숙한 언어만 허용하고,
그 언어 밖의 논리와 명료는
위협으로 느껴진다.
이때, 가장 자주 발현되는 반응은
폭력이다.
물리적 폭력일 수도 있고,
언어적 비하, 조롱, 무시, 위협의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그 모든 폭력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지금 네 논리에 입장할 수 없다.
그러니 너를 끌어내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건
지식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지식이 구성해놓은 ‘구조’에 대한 복수심이다.
그 구조 안에서 자기는
늘 불리하고,
늘 추하고,
늘 “틀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식함은 본디 죄가 아니다.
그러나 무식함이 자각되지 않을 때,
그 무지는 무기가 된다.
‘이해되지 못한 자’가 아니라
‘이해받을 의지가 없는 자’가 되면서부터.
그래서 열등감은 복잡해진다.
그건 단순한 자괴가 아니라,
내가 닿을 수 없는 언어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다.
그 분노는
‘상대’에게 향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구현한 구조 전체를 파괴하려는 충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회는,
그 무지를 방치하거나,
때론 조롱함으로써 그 분노를 가중시킨다.
결국 언어는 사라지고,
고성, 침묵, 무시, 또는 폭력이 남는다.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의 언어는 왜 그토록 제한적인가?
•그의 폭력은 무엇을 대신 말하고 있는가?
•그가 깨부수려는 건, 사실 자신의 구조가 아닐까?
무식함의 폭력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가 ‘이해받을 수 없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의 표출이다.
그 공포는 타인을 조롱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짜 해법은
지식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안전하게 느껴지는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말할 수 있는 방식이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 폭력은
그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