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젊은 날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해 본 사람은 세월이 흘러 그 상대방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 대부분 실망을 하거나 그 시절 내가 왜 그랬는지 의구심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은 비로소 오해가 시작되었다는 말과 동의어라고 한다. 그만큼 온전하게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경험과 앎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 자신만의 주관적 렌즈를 벗고 상대방을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닐까?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30%,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이 30%, 나머지 40%는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정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에겐 좋아 보일리 만무하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는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식하며 살아간다. 특히 한국인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가 하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머가 있다. 어느 날 한국인, 일본인, 프랑스인이 외계인과 만나게 되었다. 다들 너무나 신기해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먼저 프랑스인이 질문을 했다. 프랑스인은 "그곳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요?",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나누나요"라고 물었다. 다음으로 일본인이 질문했다. 일본인은 "그곳의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나요?". "돈이 되는 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다. 반면 한국인은 "그곳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질문했다. 타인의 시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고 흔들리기보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나의 판단이나 원칙, 기준이 있으면 부화뇌동(附和雷同) 하지 않게 된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잣대가 내 기준이 되어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인생 전반부가 타인에게 맞추고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전전긍긍하며 보냈다면 쉰이 넘은 인생 후반부는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살아보는 건 어떨까? 그래야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 후회가 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