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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Mar 11. 2022

영화 <애플>-잊을 수 없는 사과의 맛

오렌지는 사과를 대신할 수 없다

    

자신의 기억중에서 어떤 것을 잊고 싶고 어떤 것을 간직하고 싶은가?

기억 상실증은 어떤 기억까지 없어질까?

완전히 기억을 잃고 뇌가 리셋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집에서 멍하니 빈 침대를 바라보다 벽에 자기의 머리를 쿵쿵 찧는 젊은 남자가 있다. 때는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이 창궐하는 시기이다. 티비에서는 대책으로 특정병원에서 기억상실 환자들을 위해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방송한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던 남자는 현관에서 이웃집 개, 말로를 쓰다듬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차에서 내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꽃을 사서 걸어간다.

버스 종점에서 운전기사가 깨워서 일어난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병원으로 실려오고 여러 검사를 받은 후 2인실에 다른 환자와 같이 있게 된다. 그곳에서 제공된 식사를 하는데 사과를 맛있게 먹어서 옆사람이 자신의 사과까지 먹으라고 건네준다.

아무도 그를 찾으러 오지 않게 되자 병원에서는 인생 배우기 프로젝트를 제안하면서 그가 머무를 수 있는 작은 아파트를 제공하고, 매일 해야 할 일을 카세트 테잎에 녹음해서 우편함에 전달하고, 수행한 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앨범에 붙이라고 한다.

과제는 자전거 타기, 가장무도회 참여하기, 댄스 클럽에서 여자와 춤추기, 공포 영화 보기, 운전하기, 다이빙 하기,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 자기 등등이다.

거리 곳곳에서는 이런 과제를 수행하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운전하는 법을 잊어버려 자동차를 타고 나무로 돌진하기도 한다. 이 과정 중에서 주인공은 공포 영화 보기 과제를 하다가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호감도 느끼고, 자신과 그녀의 공간에서 상대방의 앨범을 보며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의 사과 사랑은 여전해서 거주지 근처의 과일 가게에서 자주 사과를 사서 먹는다. 가게 주인이 오렌지를 권해도 사지 않다가 사과를 먹으면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말을 하자 사과 대신 오렌지를 사서 먹는다. 길을 가다가 상점 쇼윈도우 속 티비에서 방영하는 사랑하는 두 연인의 장면을 오랫동안 서서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관심을 가졌던 여자의 행동이 그녀의 진심이 아니라 과제 수행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고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말기 환자 돌보기 과제에서 만난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자기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죽었다는 고백을 하며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인의 아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그분은 당신을 잊을 필요가 없어서 좋겠다”는 말로 그의 심정을 표현한다.

결국 그는 죽은 아내를 잊을 수가 없어서 자신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싶은’ 남자였다.

그는 원래의 자기 아파트로 다시 돌아와 아내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집을 떠난 동안 식탁에 오랫동안 놓아 두어서 시들은 사과 중 하나를 골라 상한 부분을 도려내고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다시 꽃을 사서 아내 안나의 묘지로 가서 시들은 꽃을 치우고 새 꽃을 올려놓는다.


          

일단 이 영화를 감상하려면 감독의 몇가지 설정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첫째, 도시에 원인도 모르는 단기 기억상실증이 창궐하고 있고, 이 증상은 지금까지 치료된 적이 없다. 둘째, 나라에서 엄청나 예산을 투입해서 이 환자들의 재활을 위해 노력한다. 아파트와 생활비도 제공하고 과제 수행을 잘하는지도 많은 인력을 투입해서 모니터링한다. 세째, 디지털 기기는 없는 세상이다. 휴대폰은 커녕 유선 전화도 없다. 연락을 하려면 집에 직접 찾아가 현관의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사진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서 즉시 인화하여 앨범에 넣는다. 과제를 부여하는 방법도 현재 어린 세대는 본적도 없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로 재생해서 듣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이영화는 반전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 남자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이 언제 그것을 느끼는지는 각자 다를 수 있으나 감독은 계속해서 차고 넘치도록 단서를 제공한다.

병실의 옆에 있는 환자는 자신이 사과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자체를 기억 못하는데 반해 주인공은 사과의 맛을 처음부터 알고 있고 좋아한다.

다른 사람은 요리 방법을 기억조차 못하는데 반해 주인공은 자신의 예전 레시피를 기억해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감찰관조차 맛있어하는 요리를 만든다.

공원에서 이웃집 개를 만났을 때 말로라는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다.

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 어떤 위치에 맞으면 아픈지를 기억해서 그 자리에는 놓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길거리 핫도그를 사 먹을 때 겨자를 뿌려야 맛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여자와 함께 차 안에서 나오는 음악의 가사를 기억하고 따라 부르며, 그녀와는 달리 1분이 60초라는 정보도 기억한다.

과일 가게 주인이 어디 사냐고 물었을 때 먼저 살던 집 주소를 이야기한다.

    

설정은 아날로그 시대인데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보는 방식은 요즘 세대가 소셜미디어에 자신을 드러내는 라이프 스타일과 비슷한 기시감을 준다.

영화에서 과제를 관리자들이 선정해서 준다는 것은 다르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들이 유행하는 트렌드에 따라 핫스팟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그것을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지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안다는 점이 매우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경험의 주제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부분은 심리학적으로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부분일 뿐 그 사람의 진심이 아니다.

결국 단체 여행처럼 미리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누구나 비슷한 활동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는 ‘경험’이라고는 볼 수 없는 ‘체험’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인공도 잠시 호감을 느꼈던 여성과의 관계에서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체험에서는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를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잊고 싶다.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다 잊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누구도 아내처럼 진정한 사랑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아내를 잊으려 노력하지 않기로 한다.

오렌지는 결코 사과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했던 공간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사과를 먹는다.

이토록 슬픈 사랑 한 조각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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