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를 좋아하시던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여름이면 오이지를 담가서 가져다 드리는 일은 연례행사였다. 부모님 닮은 나도 오이지를 좋아하는데, 김치도 썩 잘 담그지 못해서 사 먹는 주제에 사 먹는 오이지는 입맛에 맞지 않아서 꼭 집에서 담갔다.
요즘은 인터넷에 물 없이 간편하게 담그는 오이지 레시피도 많지만, 나에게는 단맛 없이 순수한 소금만으로 발효된 전통 오이지가진짜 오이지이다.
또한 오이지를 썰어서 짠맛을 빼고 꼭 짜서 갖은양념에 무쳐 먹는 오이지무침도 가끔은 맛있지만, 그냥도 맛있는 오이지에 과도한 양념은 나에게는 투 머치로 느껴진다.
더운 여름날 입맛이 없을 때, 잘 익은 오이지를 썰어서 찬물을 붓고 청양고추와 쪽파를 송송 썰어서 넣고 한나절쯤 냉장고에 놔두었다가 먹는 오이지 냉국은,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정말이지 일품이다. 한여름 보리차에 밥을 말아서 물에 잠긴 오이지에 보리굴비라도 곁들여 먹으면 어떤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다. 혹시라도 입덧하는 엄마들이 있다면 꼭 먹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만들어보면 이것보다 쉬운 음식이 없다. 소금 농도만 잘 맞추어주면 내 손을 떠난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시간이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절기에 맞추어 만들어놓고 기다렸다가 더운 한여름에 먹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 시간이란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발효의 시간이다. 미생물이 오이의 영양분을 분해해서 새콤한 오이향을 내는 물질을 만드는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글의 제목인 ‘시간의 향기’란 문학적인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 화학반응 후 만든 물질이 내는 냄새이다.
전통적인 장의 향기도, 와인의 깊은 향기도, 김치의 숙성된 냄새나 요거트의 시큼한 냄새도 다 시간이 만들어 낸 향기이다.
패스트푸드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발효의 시간이 필요한 향기로운 슬로우푸드를 권하고 싶다.
물론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먹을 때 느끼는 냄새로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있다. 나는 우선 먹을 때 오이지를 좋아하시던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이 당장 떠오른다. 여기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 만들 때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한 된장과 간장을 담가 주시던 시어머니도 떠오른다. 어머니는 몸이 건강하실 때 늘 장을 담가 주셨다. 결혼 전에는 집에서 장 다리는 냄새가 고약하다며 코를 막고 밖으로 나가버리기도 했었던 내가, 살림을 하고 음식을 하면서 집에서 담근 간장에서 향기가 나는 기적을 경험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해지시고 더 이상 장을 담그시지 못하게 되면서 나도 장을 사 먹게 되었다. 건강하고 깊은 맛이 아니라 입에 달라붙는 화학조미료가 느껴지는 맛이지만 도리가 없으니 사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 당연하게 받아먹었던 장이 어머니가 주셨던 사랑이었음을깨달았다. 이런 일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장 담그기를 배우고 싶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참으로미숙한사람이었다.
아직 해보지 않아서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오이지 레시피를 공유한다.
-오이지 오이 50개를 깨끗이 씻어서 물기를 완전히 뺀다.(오이지 오이는 길이가 짧고 껍질이 두껍다. 그러나 때를 놓쳤다면 그냥 백오이를 사서 해도 된다.)
-스텐 곰국 솥에 물 1L에 천일염 1컵의 비율로 적당한 양을 넣고 끓인다.(음식은 재료의 질을 넘지 못하므로 기본 재료인 소금은 반드시 품질 좋은 천일염을 사용해야 한다. 소금물은 솥의 2/5 정도로 넣어야 오이를 넣었을 때 넘치지 않는다. 솥이 작은 경우 두 개로 나누어서 해도 된다.)
-뜨거운 소금물에 오이를 넣는다.
-오이가 떠오르지 않게 접시를 위에 놓고 유리 밀폐용기에 물을 담아 위에서 누른다.
-일주일쯤 후에 오이지를 누름 장치가 있는 플라스틱 밀폐용기에 옮기고, 며칠 더 상온에 방치한다.(무거운 그릇이나 편편한 돌로 누른 후 뚜껑을 닫아도 괜찮다. 오이가 국물 밖으로 떠오르지만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