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대화를 꺼린다. 마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지 않을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 화장장 같은 시설도 기피 시설로 여기고,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도 장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한 발 떨어져서 남의 일처럼 치르곤 한다.
그러나 세상의 한편엔 삶이, 다른 한편엔 죽음이 함께 존재한다.
일본의 장례 의식을 다룬 이 영화를 보면서 죽음이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하며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첼리스트 고바야시는 어렵게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으나 재정 문제로 악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여직원과 바람이 나서 집을 떠나고, 홀로 자신을 키운 엄마도 얼마 전 돌아가셔서 비어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착한 아내와 고향집에서 먹고살기 위해 주인공은 구직을 위해 노력하다가 ‘여행 도우미’라는 모호한 문구의 고액을 주겠다는 광고를 보고 어떤 회사로 들어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장례 의식 중 시신을 염습하고 납관을 하는 회사였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여행을 돕는다는 의미에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기 때문에 급여도 높고 모호한 이름과 조건을 쓴 것이다.
납관사인 사장이 고바야시를 데리고 다니며 실습을 시킨다. 그는 뻣뻣해진 시신을 어루만져서 펴주고, 예를 다해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고, 예쁘게 화장을 하는 작업을 정성껏 수행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 많다. 여자인 줄 알았는데 목욕시키는 과정에서 남자인 경우도 있었고, 고독사해서 죽은 지 오래된 시신도 있다. 그 냄새 때문에 그는 일을 마치면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또 사장의 사명감에 감동하여 그 일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어릴 때 연주하던 첼로를 꺼내는데 그 안에 돌멩이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 고바야시가 아버지와 시냇가에 놀러 갔을 때 아버지가 주었던 돌이었다. 아버지는 옛날에 문자가 없을 때 사람들이 자기 마음과 닮은 돌을 편지의 의미로 주고받았다고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매년 부자끼리 돌을 서로 주고받자고 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내에게 비밀로 하던 직업을 들키게 되자 아내는 그의 직업이 불결하다며 그만두지 않으면 집을 떠나겠다고 한다. 고향 친구도 그를 무시하며 멀리한다. 그러나 떠났던 아내가 임신을 하여 집에 돌아오고, 친구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그가 그의 어머니의 염습을 하게 된다. 정성스럽게 염을 하는 그에게 모두 감동하고 친구도 그에게 감사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오고, 처음에 고바야시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이 안 난다며 거부하지만 아내의 설득으로 부부는 그곳으로 간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혼자 살면서 부두의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가족에게 미안하여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 지방의 장의사 직원이 와서 성의 없이 아버지의 시신을 관에 넣으려고 하자 고바야시가 자기가 염을 하겠다고 나선다. 정성껏 몸을 닦고 굳어진 손을 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과거에 드렸던 돌을 꼭 쥐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면도까지 하니 잊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재회한다.
일본에 여행 갔을 때 동네 한복판에 묘지가 있어서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묘지나 화장장 같은 시설은 기피 시설이어서 주거지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그들은 한동네에 가족의 묘지가 있어서 자주 묘지에 들러 인사하고 기도하는 문화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 영화를 보니 일본의 장례 문화는 죽은 자를 염할 때 가족이 같은 방에 있으면서 납관사가 시신을 곧게 펴고 씻기고 단장하는 과정을 함께 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과거에 전통 사회였을 때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서 염도 하고 매장도 했었을 것이다. 현대 도시 사회가 되면서 도와줄 친척도 없고 장례가 일종의 기업이 되어 돈을 받고 모든 일을 맡아서 하면 유족들은 그들의 지도에 따라 그저 인사만 하면 되게 변한 것이다. 나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수의를 입고 깨끗하게 단장한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지만 염하는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도 결국 세상을 뜬다는 것을 납관 의식과 동네의 묘지를 통해 항상 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도 얼마 후 죽을 것이라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어도 ‘메멘토 모리’가 저절로 마음에 각인된다는 것이고, 인생의 유한성을 느낀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현재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생과 죽음이 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존재와, 죽음을 외면하고 부인하는 존재의 삶의 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속물적으로 돈과 권력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죽음을 외면하며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가까운 가족과 존경하던 사람들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삶까지 받아들이고 이어서 살 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몇대에 걸쳐 가업을 잇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바야시가 염하는 과정을 축약해서 보여주는데 마치 아름다운 예술 작업을 하는 듯하여서 감동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낮게 보던 사람들도 가족이 죽었을 때 보여준 그의 예의와 정성에 감사하고,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아름답게 기억하게 해 준 그의 솜씨에 감탄한다.
동물들도 혈육을 잃으면 슬퍼하지만 '이별의 의식'을 만들어서 남은 자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행위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다. 인간은 나라와 지역마다 각자 다른 장례 문화를 가지고 죽음을 애도한다.
염을 하는 납관사들은 돌아가신 분들에게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는 사람들이고, 그 덕분에 남은 자들도 아름다운 의식으로 이별을 하고, 사는 동안 그분들을 기억하며 힘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