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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Feb 05. 2024

나도 야수에게 반했다

야수의 서재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속 서재

가끔 바람이 쐬고 싶을 때 파주에 가서 출판단지에 있는 ‘지혜의 숲’을 찾는다.

실제로 책의 재료가 나무이기도 하니 숲이라는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높은 층고의 벽면을 가득 채우는 서고의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숨을 쉬면 많은 책들의 지식이 피톤치드처럼 내 안에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숲에서 들려오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수많은 저자들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숙연해지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코엑스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도 꼭 들르는 장소이다. 그저 상업시설일 뻔했던 공간의 격을 높여서 많은 시민들에게 선물한 감사한 장소이다. 비싼 땅을 무상으로 제공한 것 같지만, 아마도 덕분에 사업적으로도 이익을 보게 되어서 서로 윈-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매혹되는 일의 시작은 디즈니 영화 ‘미녀와 야수’ 속 야수의 서재가 아닌가 한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야수의 성으로 들어간 벨이 처음에는 야수의 야성을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지만, 도망가는 미녀가 늑대에게 공격당하자 야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싸우다가 다치게 되고, 벨이 그를 간호하게 된다. 그때 야수가 벨이 시작한 셰익스피어의 문장의 뒷부분 완성하자 벨이 깜짝 놀라게 되고 야수는 벨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서재로 데려간다.  서재의 천장까지 꽉 찬 어마어마한 서고를 보고 벨은 야수를 다시 보게 된다. 그 책들을 다 읽었냐는 질문에 외국어로 된 책도 있으니 다 보지는 못했다는 말을 듣고 야수의 지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는 심지어 벨에게 그서재를 공유하자고 한다.  동화의 주제는 미녀가 야수 안의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왕자의 인격)을 알아보게 되어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야수가 서재의 그 많은 책을 소장하고 읽은 것을 알고부터일 것이다.

그때 미녀만 서재를 보고 반한 것이 아니라 나도 그 서재를 보고 반했다. 나도 그런 공간을 가보고(가지고?) 싶었다. 바꾸어 말하면 나도 야수를 사랑한다.

최근에 문을 연 수원의 별마당 도서관의 사진을 보니 구조가 영화 속 야수의 서재와 아주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거기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인테리어로서가 아니라 실제 읽을 수 있는 책의 공간은 도서관이다. 독서실이 아닌, 책으로 둘러싸이고 책을 꺼내서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은 정말이지 천국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도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으로 운영되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거기서 책도 빌려주고 토론도 하고 문화 프로그램도 한다. 책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공간에서는 그냥 수다가 아닌 진솔한 대화가 오간다. 


문제는 내가 책을 물리적으로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책을 만지고 넘기며 중요한 구절에 밑줄을 치고 메모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책은 여러 번 읽고 그때마다 다른 색으로 줄을 친다. 내 방의 책장에 꽂아두고 언제고 생각날 때 꺼내 볼 수 있는 게 좋다. 도서관에서 꺼내거나 대여한 책은 그런 행위를 할 수가 없다. 대여 기간을 지켜야 하고, 밑줄 대신 노트와 포스트잇으로 대신할 때도 있지만 무언가 미진해서 정말 좋아하는 책은 결국 사서 줄을 쳐가며 봐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는 다른 장소가 서점이다. 요즘 대형서점에는 책을 볼 수 있는 넓은 테이블도 있다. 관심이 있는 책을 꺼내서 앉아서 읽다가, 다 읽었더라도 마음에 들면 결국 사서 들고 나온다. 하지만 어떤 책은 마음먹고 갔는데 막상 훑어보니 굳이 사고 싶지 않은 책들도 있다. 이런 시행착오는 온라인 서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산 책 중 실패한 책들도 많다. 할인율이 낮더라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특별한 공기를 맛보며 책을 실제로 훑어보고 사기를 권한다. 서점들이 수지를 맞추지 못해 망해서 서점이 없어진 거리를 상상하면 너무 슬프다.


이렇다 보니 딱히 물욕이 많지 않지만 책 욕심은 많아서 책을 많이 산 편이다. (환경을 생각하면 좋은 습관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남편이 내가 책을 좋아하니 어디 들고 갈 때도 가볍고 좋을 것 같다며 전자책 리더를 선물로 사준 적이 있었는데 영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는 책을 다 보고 다시 빠른 속도로 훑어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전자책은 그렇게 휘리릭 넘길 수가 없었다. 종이를 만지며 펜으로 줄을 친 부분을 넘겨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 기기는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사용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아무나 책을 가지지 못했었다. 귀족들이나 수제품으로 만든 멋지고  비싼 양장본을 소장했었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쉽게 책을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어서 다행이다. 책이 인테리어가 아니라면 어떤 책이 책장에 있는가가 그 사람을 많이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친구가 될 수 있는지, 결혼할 수 있는지를 상대방의 책장을 본 뒤 결정하라고 하고 싶다. 미녀도 야수의 책장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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