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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Oct 05. 2023

"안 하고 싶습니다"

책 <필경사바틀비> by 허먼 멜빌

     

어른이 되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특히 급여를 받는 회사의 일이나, 여성의 경우 제사나 명절등 전통적인 의무는 자신이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성격의 일들이 아니다. 그럴 때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속의 유명한 대사 “하고 싶습니다.(안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가 목구멍까지 나올 때가 많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아무리 등 떠밀고 강요해도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바틀비가 일단 너무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고용주인 변호사나 그의 동료 필경사들 쪽에 이입해보면, 바틀비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 자기들만 덤터기를 쓸 테니 짜증나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경우도 어떤 일을 안 하는 쪽을 선택하지 못한 이유가, 내가 빠졌을 때 그 일을 함께 나누어서 하던 사람들이 나의 몫을 덤터기 쓰는 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없어도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내가 하던 은 다른 사람들이 맡아 이전보다 많은 양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어떤 일에 대한 적극적인 선호가 아닌, 부수적인 미안함과 인간관계 유지 때문에 안 하겠다는 선택을 못했었다.

        

이렇게 표면적으로 적용한 예 이외에도, 이 책은 읽을수록 여러 층위의 의미가 보인다.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알고, 선택해서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여유가 있어도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경제적인 여유와 자유가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억지로 등 떠밀려서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바틀비가 소외된 현대인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틀비는 필경사가 되기 전 우체국에서 받을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배달할 수 없는 편지들을 담당했었고 그 편지들을 확인하고 모아서 태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편지에는 용서한다는 말이 들어 있지만 그것을 받을 사람은 이미 절망하면서 죽어버렸고, 헌금이 들어 있지만 그 돈이 구제할 사람은 이제 먹을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살리려고 쓴 편지들이 죽음에 도착한 것이다.

바틀비처럼 고독하고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그런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절망을 더 깊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곳에서 해고된 후 필경사가 된 바틀비는 처음에는 밤을 새워가며 미친 듯이 필사를 하지만 얼마 후부터 필사본 검토를 거부하고, 심부름도 거부하고, 변호사를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결국 그의 업무인 필사도 안 하기로 한다. 견디지 못한 1인칭 화자인 변호사가 자신이 사무실을 이사하는 방법을 택해도 그는 거기를 떠나지 않기로 하고 그 사무실에서 버틴다. 새로운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게 끌려 감옥에 들어가서는, 먹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결국 죽는다.

    

그를 고용한 변호사는 이상하게도 바틀비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고 그가 신성한 섭리의 목적에 의해 그에게 할당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의 임무는 바틀비가 머물렀으면 하는 기간만큼 그에게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바틀비도 변호사와 함께 있고 싶어하지만 결국 견디지 못한 변호사는 그를 떨쳐낼 궁리를 하게 되고, 결국 그를 떠난 바틀비는 먹지 않는 쪽을 택하고 세상을 뜬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볼 때 바틀비는 세속적인 변호사 내면의 깨끗하고 존엄한 가치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보통 사회적 페르소나에 충실한 사람의 그림자 하면 어두운 이미지를 생각하기 쉽지만, 적당히 때 묻은 사람의 그림자는 오히려 단정하고 기품있고 존엄한 이미지일 수 있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을 많이 맡아 적당히 타협하고 처리하는 속물 변호사이지만, 내면에는 자유롭고 고독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다. 변호사의 내면의 목소리는 그가 하는 일이 의미 없고 지루하고 피곤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가 인간답게 살려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른이 먹고 살려면 그러면 안 된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그는 이런 내면의 갈등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페르소나의 할 일이다. 페르소나는 바틀비의 말을 듣는 것이 괴로워서 그를 없애 버리려고 하지만, 눈에는 안보이게 됐을지 몰라도 변호사의 마음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바틀비는 그가 과거에 담당했던 배달 불능 편지 속의 메시지처럼, 수취인에게 삶을 선물하러 온 존재이다. 다행히 그는 수취인이 죽기 전에 그들에게 도착하여 그들을 살린다. 들에게는 아직 존엄한 마음의 불씨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던 변호사와 동료 필경사들도 바틀비와 만난 이후부터는 어떤 것을 좋아서 택한다는 패턴의 언어를 쓰게 되며(I woud prefer to), 이는 그들이 이제는 어떤 행위를 하기전에 자신이 그것을 하고싶은지 안하고싶은지를 생각하고 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바틀비가 그들의 마음 안에 존재하게 되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을 살렸다는 뜻이다.

     

바틀비를 비롯한 모든 인간에게, 하고 싶은것을 할 자유가 항상 보장되지는 않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는 언제나 있다. 그가 여전히 창백하고 형형한 눈빛으로 인간에게 말한다.

“I would prefer not to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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