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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Jun 20. 2024

영화<파묘>-마음을 파헤치다

개인 무의식과 집단 무의식

    

사람들은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믿는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의 뒤편엔 어둠이 있고 그곳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이 영화는 그 어둠의 존재들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단절된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통역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화에는 우리에게는 무당이라고 불리고, 서양에서는 영매나 중간자(medium)라고 불리는 존재가 등장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음양오행

무당 이화림은 제자 봉길과 함께 LA에 사는 부잣집의 아기가 이름 모를 병에 시달리는 것을 해결해 달라는 아기 아빠의 의뢰를 받고 미국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아기를 본 순간,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아기엄마에게 아기 아빠와 할아버지도 비슷한 증상이 있지 않냐고 묻자 깜짝 놀라며 인정한다. 의뢰인인 아빠는 자신의 형도 정신병으로 자살했고 아버지와 자신도 귀신이 보이고 몸에 이상한 증상이 있다고 한다. 화림은 모두에게 그의 조부의 그림자가 씌인 것 같다며 묫바람이니 파묘하고 이장하는 것이 답이라고 한다. 그는 거액의 사례금을 약속한다.

2. 이름 없는 묘

화림은 유명한 지관 김상덕을 찾아가서 사례금이 많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제의한다. 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첩첩산중에 있는 사유지의 철문을 따고 들어가니 근처에는 여우가 출몰하고 꼭대기에 허름한 묘가 있는데 묘비에는 이름도 없고 그저 위도와 경도가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재산에 비해 묘가 소박하다고 하니 당시 유명하던 기순애라는 스님이 잡아준 명당이라고 하며 도굴꾼이 손댈까 봐 일부러 손질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장소가 악지여서 잘못 손대면 줄초상이 난다며 일을 맡기를 꺼린다. 의뢰인의 어린 아들을 살려달라는 애원에 할 수 없이 일을 하기로 한 사람들은 파묘시작 전에 액을 막기 위해 대살굿을 하기로 한다. 돼지들에게 대신 액이 돌아가게 하는 굿판을 벌이고 삽을 뜨는데 예전에는 왕이나 쓸 수 있던 고급 향나무 관이 나오고 유족들은 관을 열지도 말고 바로 화장해 달라고 한다. 운구차에 관을 가지고 내려올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비 오는 날 화장이 좋지 않다는 말에 하룻밤 병원 영안실에 놔두었다가 화장하기로 한다.

상덕은 도중에 있던 절 보국사에 들러 스님에게 산꼭대기 묘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 묘를 찾으려고 많은 도굴꾼들이 들락거렸으나 못 찾았다며 그들이 쓰던 연장이 창고에 아직도 있다며 보여준다.

3. 혼령

영안실 직원이 고급 관속에 혹시 보물이 들어있나 하여 몰래 관을 개봉하고 거기서 무언가 ‘험한’ 것이 나온다. 그것은 의뢰인의 조부의 혼령으로, 미국으로 가서 늙은 아들과 며느리를 해치고 손자에게도 힘을 행사한다. 소식을 듣고 찾아간 상덕 앞에서 손자인 의뢰인은 “장하도다 반도의 청춘들이여, 전진하라! 욱일기에 빛나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쓰러진다.

아기에게도 혼령이 찾아와 위급해졌을 때, 급히 관을 통째로 화장하니 그 순간 아기가 회복된다.

4. 동티

묘를 판 인부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다시 묫자리를 찾은 상덕은 땅을 다시 파다가 무언가 삽에 닿는 감촉을 느낀다. 개인의 묘 아래에 또 하나의 거대한 나무관이 수직으로 묻혀있었다. 첩장인 것이다. 같이 일한 무당들과 장의사를 불러서 그것을 보국사 창고로 옮긴다. 그는 의뢰인의 고모를 불러 묘의 주인이 매국노 박근형이라는 것을 확인하지만 그녀도 첩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고 다만 기순애가 여우처럼 생긴 일본인이라는 것만 알아낸다.

5. 도깨비불

봉길이 보국사에서 자다가 악몽에 시달리다가 나가보니 돼지우리에서 역한 냄새가 나며 돼지와 사람이 죽어있는 것이 보인다. 창고에 들어가 보니 천정이 뚫려있고 거대한 몸집의 귀신이 일본어로 “은어와 참외를 대령하라”라고 명령하며 봉길의 배를 뚫고 손을 집어넣으며 봉길의 정신을 사로잡은후 도깨비불이 되어 날아간다.

중상을 입은 봉길을 입원시키고 화림은 상덕에게 그것은 몸이 없는 혼령이 아니라 혼이 사물에 붙어 같이 진화한 정령이었다고 한다.

상덕은 의뢰인이 죽기 전에 한 말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한다.

6. 쇠말뚝

보국사의 창고에서 도굴꾼으로 불리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연장과 서랍 속 사진을 보니 그들은 도굴꾼이 아니라 일제가 한국 땅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침을 박은 것을 빼고 다니는 애국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연장을 가지고 상덕은 다시 산에 오른다. 땅을 계속 파다가 그는 일본 장군의 머리를 발견한다. 그가 쇠침을 지키는 정령인 것이다. 그들은 은어로 정령을 신령한 나무로 유인해서 시간을 끌고 그동안 상덕이 쇠침을 찾기로 하지만 아무리 땅을 파도 쇠침은 나오지 않는다. 화림이 산신령인 척하고 일본 정령과 대화하는데 그는 전쟁의 신으로 적들이 그의 목을 베었지만 자신은 육신을 초월했다고 한다. 그가 다시 혼불이 되어 솟구치고 원래의 묫자리로 돌아와 상덕의 배를 움켜쥐었을 때 상덕은 그가 바로 쇠말뚝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기순애가 그의 시체를 가져올 때 몸속에 쇠침을 박아서 가져온 다음, 수직으로 세워서 땅에 묻었기 때문이다.) 그의 본질인 쇠와 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나무와 물이어서 물에 젖은 나무만이 그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덕이 온 힘을 다해 젖은 목침으로 그를 찌르자 일본 장수의 정령은 사라진다.

병원에서 회복한 상덕과 무당들과 장의사도 평온한 일상을 회복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야기는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돈도 많고 떵떵거리며 산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친일파를 벌주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아닐것이다. 나는 다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이 영화가 다루어주어서 좋았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신의 조상이 죄로 쌓은 부를 아무 생각 없이 태연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의뢰인 가족도 죄책감으로 로워하며 미국으로 도피한 것이다.

아무리 은폐하려고 해도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친일파 조부의 수치스러운 행적은 후손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고 그것을 느끼는 후손들의 마음은 병들어간다. 조상의 묘를 파헤치는 작업은 그런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을 은유한다. 조상의 죄를 은폐한 채 꺼림칙하게 부를 누리는 일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그들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그들이 관을 개봉조차 하지 않고 태워버리려는 의도는 끝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일단 의식층으로 나온 무의식은 자신을 제대로 직면하지않는 자아를 파멸시킨다. 마지막에 아기를 살려주는 것은 이제 태어난 존재가 먼 증조부의 업보까지 뒤집어쓰는 것은 가혹한 일이고 여러 대를 지나며 그 유전자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 아래에 묻힌 일본 장군의 까지 등장한다. 이것이 애국심 충만한(국뽕) 과한 설정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이것이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층위에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집단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의 형성 기간에 비해, 우리 민족이  짧은 기간에 집단 무의식을 형성했다는 것이 무리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일제 식민지 36년은 한국인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지금도 일본에 대해 무조건  피해의식을 가지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우러러보며 감사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감정보다 양극단의 감정만 많다는 것이 아직도 한국사람들이 식민지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을 우리 국토를 상징하는 범과 일본을 상징하는 여우에 빗대고 특정 지점을 국토의 허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쇠침을 박은 것이 우리의 정신을 속박하는 행위라고 비유한 것이다. 아기가 조상의 죄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세월이 흐르면 식민지 시대에서 자유로운 세대도 출현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적인 것에서 자유로운 것은 바람직하지만 민족의 무의식 깊은 곳에 무엇이 는지는 파헤쳐봐야 하지 않을까.(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에서 개인의 죄책감과 집단의 피해의식을 첩장 된 묘지를 파헤치는 이중의 의식을 통해 비유해서 신선했다. 전통 무속인 굿도 고증과 훌륭한 연기를 통해 보여주어서 눈호강을 했다. ‘대살굿’에서 인간 대신 죽임을 당하는(이미 죽은 돼지를 쓰지만) 동물의 모티브를 다른 종교의 모티브에서도 많이 보아왔지만 일종의 공연을 보는 듯 흥미로웠다.

음과 양, 무의식과 의식, 죽은 자와 산 자 사이를 중재하는 중간자로서의 무당이 죽은 자의 영혼을 자기 몸으로 불러들인다는 ‘초혼굿’도 그럴듯 했다.

심리학적인 상징과 은유를 찾으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여서 무서운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관객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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